《 롯데백화점의 김모 상품기획팀장은 최근 팀장에서 수석바이어로 낮아졌다. 기존에 팀장으로서 했던 업무는 바로 위 상사인 부문장이
맡게 됐다. 회사의 직급 체계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롯데백화점은 기존에 ‘본부장-부문장-상품기획팀장-선임상품기획자-상품기획자’였던
직급 단계를 ‘본부장-부문장-수석바이어-바이어’로 줄였다. 롯데백화점 측은 “현장에서의 의사결정을 신속하게 하고 실무인력을
강화하려는 조치”라고 설명했다. 최근 기업들 사이에서 직급을 ‘구조조정’하려는 움직임이 가속화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이와 관련해
‘쓰나미’ 수준의 변화를 예상하고 있기도 하다. 직급 체계를 손보는 기업들은 대부분 내년부터 300명 이상 사업장에서 정년이
60세로 연장되는 것을 앞두고 인사 적체를 해소하고 ‘고참’을 실무 현장에 배치하려는 의도가 있다. 》
신세계그룹은 올해 1월부터 기존의 6단계 직급(사원-주임-대리-과장-부장-수석부장) 체계를 4단계로 간소화했다. 새 직급에는 ‘밴드제’를 도입해 △사원과 대리는 밴드 4단계 △대리∼과장 4년차는 밴드 3단계 △과장 5년차∼부장 4년차는 밴드 2단계 △부장 5년차∼수석부장은 밴드 1단계가 된다. 이 중 밴드 2∼4단계 직원의 호칭을 모두 ‘파트너’로 통일했다.
신세계그룹에서는 대졸자가 입사하면 곧장 사원이 되고 2년 뒤 주임, 3년 뒤 대리, 3년 뒤 과장, 6년 뒤 부장, 6년 뒤 수석부장이 되는 게 정상이었다. 승진에서 누락하지 않아도 입사한 뒤 임원 직전 직급인 수석부장이 되기까지 꼬박 20년이 걸렸다.
하지만 새로운 체제에서는 18년 만에 수석부장급이 된다. 언뜻 보면 빨리 승진할 수 있는 것 같지만, 승급을 못하는 사람은 특정 밴드에 6년 이상 눌러앉을 수도 있다. 한 직원은 “현장에서 열심히 하지 않으면 평생 승진을 못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고 말했다.
롯데그룹 역시 이미 ‘사원-대리-과장(갑·을)-차장-부장’ 체제를 ‘실무자-책임(과장급)-수석(차·부장급)’으로 간소화한 데 이어 지난해 12월에는 임원 직급 체계도 기존 7단계에서 5단계로 간소화했다. 이 역시 정년 연장과 무관치 않다. 포스코도 9, 10단계에 이르던 일반 직원 직급을 6, 7단계로 단순화했다.
기업들이 이처럼 직급 구조조정에 나선 속내는 복잡하다. 전통적으로 국내 기업들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승진하는 연공서열형 승진 체계를 고수해 왔다. 고성장을 구가하며 우수 인력 부족 현상을 겪고 있던 대기업들은 승진 제도를 통해 인재 이탈을 막았다.
하지만 저성장 시대에 접어들면서 승진할 자리가 줄어든 데다 정년까지 연장되면서 과거의 패러다임이 통하지 않게 됐다는 인식이 강해졌다. 특히 승진 적체로 부장과 차장들이 다수인 ‘역(逆)피라미드형 구조’가 된 기업들은 인건비 부담 때문에 머리를 싸매게 됐다. 이지만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직급이 높은 고참들이 실무보다는 지휘를 더 선호하는 국내 기업 풍토에서는 기업의 인건비 지출 부담이 더 커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호칭을 파트너 등으로 바꾸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다. 예전에는 직위와 직급이 일치해 호칭에서도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하지만 새로운 체제에서는 직위, 직급, 직책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다. 이제는 직위는 부장이어도 직급은 차장급, 직책은 영업팀원인 사례가 생기고 있다.
다만 이런 체제가 제대로 정착되려면 만년 과장이나 고령자를 ‘무능력자’로 낙인찍는 풍토가 사라져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인사 전문가인 고준 러셀레이놀즈 상무는 “금융회사의 연체관리·여신평가, 유통회사의 바이어 등의 직무는 현장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 직원이 적합할 수 있다”며 “굳이 승진하지 않아도 역량을 갖춘 고참들의 전문적인 경험을 존중하고 적절한 처우를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보다 앞서 1998년 60세 정년 의무화를 실시한 일본의 경우 직책이 없는 직원들을 위해 전문직 제도, 파견 전직 제도, 조기 퇴직 우대 제도 등을 시행하고 있다.
한편 기업의 문화를 개선하지 않고 ‘무늬만 호칭 바꾸기’는 개선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실제로 한화그룹은 3년 전 도입한 ‘매니저’(사원∼차장) 호칭을 올해 3월 없애고 직급 체계를 부활시켰다. 직원들이 외부 인사를 만날 때 매니저라고 소개해도 직급을 되묻는 등 애로사항이 많았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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