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들이 제품을 살 때 가장 먼저 보는 건 디자인이죠. 그러나 디자이너를 고용하려면 2, 3년은 내다봐야 합니다. 당장 먹고살기 빠듯한데 어떻게 디자인에 투자하겠습니까.”
중소기업 A사 대표의 하소연이다. 국내 중소기업들이 디자인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디자인에 투자하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는 “중소기업들은 기본 디자인은 다른 제품을 카피하면서 캐릭터나 색상 등만 바꿔 제품을 내놓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고 털어놨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수출 중소·중견기업 307개사를 대상으로 2012년 진행한 조사에 따르면 기업들의 32.2%는 수출 경쟁력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 ‘품질과 디자인’을 꼽았다. ‘가격(42.7%)’ 다음으로 응답률이 높았다. 반면 한국디자인진흥원에 따르면 2013년 기준 국내 중소기업 중 7.9%만 자체 디자이너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향은 성신여대 산업디자인과 교수는 “중소기업들은 ‘무형의 가치에 자금을 투자해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디자인에 대한 투자를 기피하는 경우가 많다”며 “디자인에 대한 최고경영자(CEO)들의 인식 개선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디자인 전문회사는 발주처와의 ‘갑을 관계’로 애를 먹는 경우가 많다. 한국디자인진흥원이 2012년 말 디자인회사 148곳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67%가 “디자인 대가 관련 불공정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디자인 회사 B사 대표는 “선수금을 받지 못하다 보니 프로젝트가 중간에 취소되면 몇 달치 일한 비용을 받지 못하게 된다”며 “디자인에 관한 표준계약서가 있지만 이를 준수하는 기업이 거의 없어 우리가 디자인을 개발해놓고 소유권은 발주처가 가져가는 경우가 다반사”라고 말했다. 다른 디자인 회사 관계자는 “최근 10년 새 디자인 용역비가 거의 오르지 않아 회사를 운영하기도 빠듯한 실정”이라고 말했다.
이렇다 보니 디자인 회사의 근무환경은 열악한 편이다. 한국디자인진흥원에 따르면 2013년 기준 디자인 회사의 디자이너 임금은 3년 차 이하는 월 168만 원, 15년 차 이상은 350만 원에 그쳤다. 디자인 전공자들이 입사를 꺼리는 ‘일자리 미스매치’의 주요 원인이다.
반면 디자인 역량을 강화해 해외 시장을 뚫은 중소기업들도 있다. 샤워기 전문업체 세비앙은 2010년 국내 건설경기가 악화되자 국내 한 대형 건설회사에 진행하던 납품이 중단됐다. 매출은 반 토막 났다. 류인식 세비앙 대표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아파트 100채를 돌아다니며 욕실을 살펴봤다. 사람들은 목욕탕 구석에 선반을 놓거나 아무데나 샴푸, 린스를 놓아뒀다.
류 대표는 디자인에서 답을 찾았다. 세비앙은 디자이너 3명, 엔지니어 4명으로 구성된 자체 디자인기술연구소를 중심으로 2012년 샤워기 거치대와 수납공간을 하나로 합친 ‘가로본능’을 선보였다. 금속 사용량을 40% 줄이는 기술을 개발해 원가도 절감했다. 류 대표는 “가격이 일반 사워기 거치대보다 약 2배 비싸지만 납품이 중단됐던 기업에 다시 납품을 시작하게 됐고, 미국 영국 러시아 베트남 싱가포르 등에 수출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여행용품 회사 알리프의 제품은 50개국 3500여 개 매장에서 판매된다. 프랑스 대표 백화점 봉마르셰와 라파예트,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에서도 알리프 제품을 볼 수 있다. 엄세영 알리프 대표는 인기 비결로 “여행 중 생길 수 있는 여러 상황들에 대해 고민한 뒤 그 해결책을 디자인을 통해 찾았다”고 설명했다. 대표 제품은 재킷을 팔에 걸지 않고 가방에 걸 수 있도록 한 ‘재킷 그리퍼’, 짐을 편리하게 싸고, 찾게 해주는 ‘인러기지 파우치’ 등이다.
알리프는 직원 20명 중 7명이 제품 디자이너다. 사업 총괄 및 생산관리직군에도 일부 디자이너를 배치했다. 엄 대표는 “제품 기획, 디자인, 제조, 판매, 마케팅, 물류 등 전 과정에서 브랜드가 추구하는 디자인 방향을 일관되게 지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라며 “2년 차 이상 된 디자이너들은 매년 2번 이상 해외에 시장조사나 전시회를 나가 바이어로부터 피드백을 수집하고 경쟁 브랜드를 연구한다”고 말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