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은 기업서만 하는일? 일반인의 ‘사용자 혁신’ 활동 없다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5월 8일 15시 4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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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트서핑은 대형 연(鳶, kite)을 조종해 바람의 힘에 따라 서핑보드를 끌면서 물위를 활주하는 해상 스포츠다. 카이트서퍼의 숙련도에 따라 단순히 보드를 타는 수준을 넘어 물 위로 수 미터씩 점프하거나 하늘을 나는 고난도 기술을 구현할 수 있다. 구사할 수 있는 기술 수준은 어떤 장비, 즉 어떤 카이트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크게 좌우된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카이트서핑 관련 산업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초기 카이트 개발은 카이트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기업이 아니라 몇몇 카이트서핑 마니아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서핑기술 난이도에 따라 다양한 디자인의 장비가 필요하다고 느낀 사용자들이 스스로 카이트 개발에 나선 것이다. 이들은 커뮤니티 사이트 등을 통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공유하며 카이트를 스스로 만들고 개량해 나갔다. 더 나은 카이트 제작을 위해 사용자 스스로 혁신을 주도해 나간 것이다. 미국 MIT 에릭 폰 히펠 교수가 주창한 ‘사용자 혁신’의 대표 사례다.

사용자 혁신은 제조업체에 혁신을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혁신을 창출해 나가는 사용자들의 활동을 가리키는 개념이다. 과거 공급자 중심의 경제 구조에서 소비자는 기업이 내놓은 신제품을 일방적으로 공급받아 쓰는 수동적 존재로만 여겨졌다. 혁신은 으레 기업에서만 하는 일로 간주됐다. 하지만 카이트서핑 사례에서 드러나듯, 개인 사용자도 제품 혁신의 주요 원천이 될 수 있다. 더욱이 CAD, 3D프린팅 등 기술 발달로 인해 일반인도 자신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제품을 설계하고 직접 만드는 일이 날로 수월해지고 있다. DBR(동아비즈니스리뷰) 175호(4월2호)에서 사용자 혁신 관련 이론 및 우리나라 사용자 혁신 현황에 대해 소개했다.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혁신의 새로운 원천, 사용자

사용자 혁신에서 말하는 사용자란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사용함으로써 효용을 얻기를 기대하는 기업 혹은 개인 소비자’를 뜻한다. 배성주 연세대 교수는 “‘소비자’와 달리 ‘사용자’ 개념에는 제품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학습을 통해 제조업체에 능동적으로 피드백을 제공하는 과정이 내포돼 있다”며 “고객을 소비자로만 바라보면 제품 출시 후 사용자들에 의해 이뤄지는 혁신적 아이디어를 간과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고 말한다.

사용자 혁신 과정에는 카이트서핑 사례처럼 문제 해결 방안을 공유하는 데 집중하는 ‘혁신 커뮤니티’가 큰 역할을 한다. 리눅스와 아파치 웹서버, XDA디벨로퍼 같은 오픈소스 커뮤니티가 대표적 예다. 비단 소프트웨어 분야에서만 사용자 혁신이 이뤄지는 건 아니다. 덴마크 기업 레고는 엘드로(www.ldraw.org, 가상의 레고 모델을 만드는 레고 CAD 프로그램 무료 공유)같은 커뮤니티를 적극 지원, 이를 자사의 레고 아이디어 웹사이트(ideas.lego.com)로 유인해 신제품 개발에 활용한다. 최근에는 쿼키(www.quirky.com)처럼 사용자 중심 제품개발 프로세스를 비즈니스에 적극 활용하는 기업도 등장하고 있다. 쿼키는 일종의 집단지성을 활용한 소셜 상품개발 플랫폼이다. 매주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수천 개 이상의 아이디어에 대해 회원들이 투표를 실시, 실제 제품으로 개발할 아이디어를 선정한다.

●국내 사용자 혁신 현황

한국과학기술원(KAIST) 김영배 교수가 2014년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전체 한국 국민들의 1.5%가 사용자 혁신 활동을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우리나라 성인 인구 중 약 54만 명이 사용자 혁신 활동에 참여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소비자들의 사용자 혁신 사례는 오락 관련 용품부터 가정용품, 의류용품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불빛이 없어도 문제없이 둘 수 있는 ‘야광 바둑알’, 빛을 감지하는 센서를 달아 아침엔 자동으로 걷히고 저녁엔 알아서 쳐지는 ‘스마트 커튼’, 추운 겨울에 열이 나서 발을 따뜻하게 해 주는 ‘발열 깔창’ 등이 대표적 사례다.

에릭 폰 히펠 교수 연구팀이 2011년 발표한 조사에 따르면, 성인 인구 중 소비자 혁신가의 비율은 영국, 미국, 일본이 각각 6.1%, 5.2%, 3.7%다. 김영배 교수의 연구 결과(1.5%)와 비교해 보면 한국과 선진국 간 사용자 혁신 활동의 격차가 크다. 개인이 사용자 혁신을 위해 투입한 비용에서도 차이가 난다. 영국과 미국, 일본은 1인당 각각 1801달러(약 194만 원), 1725달러(약 186만 원), 1479달러(약 160만 원)를 투자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한국 소비자들은 1인당 평균 628달러(약 68만 원)를 사용자 혁신을 위해 투입한 것으로 추산된다.

한국의 사용자 혁신 수준이 단순 비중 측면에서 선진국보다 뒤처지는 건 사실이지만 절대 규모로 보면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다. 해마다 우리나라 사용자들이 혁신 활동을 위해 쏟아 붓는 금액은 약 3672억 원(54만 명x68만 원)으로 추정된다.

●혁신 커뮤니티 활성화 통해 사용자 혁신 지원

기업이 소비자들의 니즈에 집중해 혁신을 창출하고 시장에서의 신제품 성공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다양한 경영 기법을 도입하려는 노력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누구나 혁신을 주도할 수 있는 ‘혁신의 민주화’ 시대를 맞아 혁신의 핵심 원천으로 새롭게 자리매김한 사용자를 활용하지 않는다면 기업들은 엄청난 기회를 잃어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김 교수는 “모방형 경제에서 창조형 경제로 혁신 전략의 변신이 필요한 우리나라에서 사용자 혁신은 새로운 혁신 대안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향후 온·오프라인 사용자 혁신 커뮤니티를 활성화하고 이들의 혁신 활동을 원활히 도와줄 수 있는 각종 개발 도구나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등 향후 일반 소비자들의 사용자 혁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노력이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위에서 예로 든 카이트서핑이 현재 어엿한 스포츠 산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데에도 커뮤니티 기반의 사용자 혁신 활동이 큰 역할을 했다. 2001년 당시 MIT 박사과정 학생으로 카이트서핑 마니아이기도 했던 사울 그리피스는 온라인 커뮤니티가 카이트 개발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전세계 카이트서핑 사용자와 혁신가들로 이뤄진 커뮤니티 사이트(www.zeroprestige.com)를 만들었다. 이후 수많은 사용자들이 각자 설계한 카이트 디자인은 물론 공기 역학 모델링 소프트웨어, 모형 제작용 소프트웨어 등 수준 높은 설계 도구를 공유했고, 이런 아이이어들을 채택한 제조업체들이 속속 늘어나면서 카이트서핑 관련 산업이 만들어졌다.

정리=이방실 기자 smi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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