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최근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의 합병에 제동을 걸고 나서면서 한국 대기업들 사이에서 ‘행동주의 헤지펀드’에 대한 경각심이 커지고 있다.
국경을 넘나들며 기업의 허점을 파고들어 투자수익을 올리는 행동주의 헤지펀드를 두고 시장에서는 주주가치를 극대화하는 ‘주주들의 구세주’라는 평가와 단기 시세차익만 노리는 ‘탐욕의 약탈자’라는 시각이 엇갈린다. 하지만 저금리, 저성장이 고착화되는 금융환경에서 수익을 적극적으로 높이려는 행동주의 투자는 앞으로 더 늘어날 수밖에 없어 국내 기업들의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두 얼굴의 행동주의 투자자
글로벌 헤지펀드 평가업체인 헤지펀드리서치(HFR)에 따르면 올 3월 말 현재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운용자산 규모는 1275억 달러(약 141조 원)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말(362억 달러)에 비해 4배 가까이로 불어났다.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지배구조가 취약하거나 경영효율이 떨어진 기업의 주식을 대량 사들인 뒤 기업경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투자수익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쓴다. 주로 인수합병(M&A), 구조조정 등의 이슈가 발생했을 때 경영진을 압박해 자회사 매각,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등을 요구하며 주가를 끌어올린다. 다른 펀드와 달리 여론을 적극 이용하는 것도 특징이다. 엘리엇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간 합병 반대 의사를 담은 보도자료를 4차례 내고 관련 홈페이지까지 개설해 여론몰이를 하고 있다.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과거엔 자본력이 약한 중소기업을 주요 타깃으로 삼았지만 자산 규모가 커지면서 점차 글로벌 대기업 쪽으로 눈을 돌리고 있다. ‘기업 사냥꾼’으로 불리는 칼 아이컨은 애플의 지분 0.92%를 확보한 뒤 자사주 매입을 요구해 최근 일정부분 성과를 올렸다. 홍콩계 헤지펀드인 오아시스는 3월 일본의 전자기기 제조업체인 교세라의 지분 1%를 획득한 뒤 항공사, 통신사 지분 매각을 압박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SK그룹을 공격한 소버린, KT&G를 압박한 칼 아이컨 등 외국계 펀드가 대기업의 지분을 매집해 경영참여 의사를 밝히다가 막대한 차익을 챙겨 떠난 사례가 있어 행동주의 투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강한 편이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행동주의 헤지펀드가 자신들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과정에서 기업의 비효율성을 제거하고 소액주주의 가치를 함께 증대시킨다는 측면에선 순기능을 갖기도 한다”면서도 “하지만 과도하게 쟁점을 만든 뒤 주가가 오르면 ‘먹튀(먹고 튀기)’를 하는 경우가 실제 많아 평가가 엇갈린다”고 말했다.
○ ‘강경파’ 행동주의 엘리엇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의 복병으로 등장한 엘리엇은 행동주의 헤지펀드 중에서도 “가장 무자비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엘리엇은 기업뿐만 아니라 아르헨티나, 페루 등 채무 위기에 놓인 국가의 국채를 대거 사들인 뒤 소송을 걸어 거액을 챙기는 투자 행태를 보여 왔다. 특히 2011년에는 내전으로 혼란에 빠진 콩고 국채를 대량 매입했다가 국제기구 등이 기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원한 원조금을 챙겨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 자산운용사 관계자는 “엘리엇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선악의 개념 없이 온갖 방법을 동원해 목표를 달성한다”며 “변호사 출신의 창업자 폴 싱어 회장이 미국 정계와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며 법의 맹점을 이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말했다.
엘리엇은 현재 삼성물산뿐 아니라 세계 각국 기업을 상대로 동시다발적으로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일본 캐논이 3월 스웨덴 감시카메라업체인 악시스를 인수하겠다고 밝히자 엘리엇은 악시스 지분 10.91%를 확보해 캐논을 상대로 인수가격을 높이라고 압박하고 있다. 이달 들어서는 미국 정보기술(IT)업체 시트릭스의 지분 7.1%를 확보한 뒤 경영진과 이사회를 상대로 자사주 매입을 요구하고 나섰다.
김예구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연구위원은 “저금리, 저성장이 지속되고 기업들이 현금유보를 늘리는 상황에서 투자수익을 높이는 데 한계를 느낀 투자자들은 행동주의 투자 전략을 강화할 수밖에 없다”며 “기업들이 이에 대응해 지배구조, 사업 전략의 취약성을 상시적으로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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