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58년 개띠’다. 서울 명문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고, 더 좋은 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한 뒤 남들이 부러워하는 대기업에 입사했다. 마케팅 부서에 배치돼 선배들과 신제품을 출시하고 성공시키면서 승진을 거듭해 입사 20년 만에 임원이 됐다.
임원 재직 3년 후 계열사 사장이 됐다. 계열사는 외국 회사의 지분이 더 많은 합자법인으로 그는 외국인 주주의 지명을 받아 대표이사가 됐다. 그리고 3년 후 54세가 되었을 때 사직했다. 아니, 잘렸다.
처음 6개월은 놀았다. “요즘은 백수가 더 바빠!” 그리고 채용 알선 회사를 통해 여러 곳에 지원서를 내고 여유 있게 기다렸다. 학력과 경력은 화려했고, 그가 성공시킨 신제품들은 지금도 시중에서 시장점유율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면접 보자는 회사가 없었다. 대표이사 사장을 지낸 ‘죄’ 때문이다. “사장까지 하신 분을 모시기가 좀….” 그는 “임원도 좋습니다”라고 했지만 연락이 안 왔다. ‘창업을 해야지. 하지만 퇴직금은 안 쓴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인적 네트워크를 필요로 하는 벤처기업에 취업했다. 직함은 대표이사. 요즘 정보기술(IT) 관련 창업을 한 젊은이들은 돈이 없다. 그가 조금씩 자기 돈을 넣었다. 그리고 2년, 매출액이 ‘0’이다. 또 다른 젊은 기업에 고문이란 직함으로 들어갔지만 결과는 같았다.
진지하게 상의할 것이 있다고 해서 필자와 만났다. 그는 “3년을 이렇게 보내면서 절실하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제가 스스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5, 6년 일하면서 직원들이 올린 서류를 결재하고, 마케팅 생산 개발 재무 부서 간의 의견 조정은 많이 했지요. 그러나 그런 경험이 새로운 사업을 성공시키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이제 느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대기업의 임원이었을 때 ‘갑’으로서의 행세만 할 것이 아니라 ‘을’에게 잘 해줬어야 한다는 반성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속한 기업을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동시에 퇴직 후의 생활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갑에게는 많은 을이 있다. 그중에서 두세 개 기업을 염두에 두고 그 기업의 내부 사정, 성장 가능성, 대기업과의 관계를 면밀히 파악하고, 친밀감을 돈독하게 해두면 퇴직 후에 그 기업에 고문으로라도 취직해 지금 기업과의 사업관계를 지원하고 강화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을에게 특혜를 줘야 한다는 게 아니다. 갑과 을, 양쪽 기업을 동시에 이해하면 양사 모두를 위한 제품과 서비스 제안을 할 수 있다는 게 그가 깨달은 교훈이다.
노년에 국민연금과 퇴직금만으로 사는 것은 재미가 없다. 가끔 가족으로부터 독립해 친구들과 놀러 갈 수 있는 건강을 평소에 챙기면서 용돈도 벌어야 한다. 손자들 재롱만 보면서 노년을 보내면 사람이 비굴해질 수 있다. 아내가 차려주는 식사만으로는 노년의 공허감을 채울 수 없다. 그런 나의 삶은 억울하다.
노년이 되어서도 대가를 받으면서 일을 해야 한다. 일을 하고 있는 바로 지금, 퇴직 후에 할 수 있는 일과 할 곳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 ‘내가 누군데’라고? 퇴직 후에는 그가 누군지 아무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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