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 롯데그룹의 경영권 분쟁과 관련해 정치권이 주요 주주인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요구하면서 ‘국민연금 주주 역할론’에 대한 논란이 다시 불붙고 있다. 정치권은 삼성물산-제일모직의 합병 과정에서 ‘캐스팅 보트’를 쥐었던 국민연금이 롯데 사태에서도 ‘해결사’ 역할을 해야 한다고 압박했다. 당초 국민연금의 적극적 개입을 주장하던 새누리당은 10일 법적인 제약 등을 감안해 소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쪽으로 입장을 다소 완화했다. 하지만 많은 민간 전문가들이 국내 주식시장에 100조 원가량을 투자하고 있는 국민연금이 세계적인 공적 연기금처럼 주주가치를 높이고 비정상적인 국내 기업들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 향후 논란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
선진국에 비해 관치(官治) 우려가 큰 국내 기업 경영 환경에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가 정부와 정치권의 기업 경영 개입을 정당화하는 통로로 악용될 수 있다는 반론도 팽팽히 맞서고 있다.
○ ‘국민연금 역할론’ 재부상
국민연금은 5월 말 현재 기금 적립액 497조 원 가운데 19.5%인 97조 원을 국내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10일 현재 10% 이상의 지분을 보유한 국내 상장기업은 73개,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기업은 모두 278곳이다.
특히 경영권 분쟁 중인 롯데그룹과 관련해 국민연금은 롯데푸드 13.49%(최대 주주), 롯데칠성 13.08%(2대 주주), 롯데하이마트 12.46%(2대 주주), 롯데케미칼 7.38%(4대 주주) 등의 지분을 갖고 있다. 지분 5%를 넘지 않아 공시가 안 된 롯데쇼핑 등 다른 계열사까지 더하면 국민연금은 1조5000억 원 상당의 롯데 주식을 보유한 것으로 추산된다.
이런 상황에서 롯데가(家)의 분쟁으로 대기업 지배구조에 대한 비판이 높아지고 롯데 계열사 주가 하락에 따른 국민연금 손실 우려가 커지자 정치권에서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 강화 요구가 쏟아졌다.
김무성 대표는 7일 롯데 사태와 관련해 “국민연금이 국민의 노후자금을 지켜낼 수 있도록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는 방안을 적극 강구해 주길 바란다”고 요구했다. 이어 10일에는 새누리당이 국민연금으로부터 주주권 행사 관련 보고를 받았다. 새누리당은 이 자리에서 적극적인 주주권을 행사하는 대신 현행법상 국민연금이 갖고 있는 소극적 주주권(의결권)을 최대한 행사할 수 있도록 추가 대안을 마련하라며 한발 물러섰다.
○ “자산 운용 제약” vs “주주 행동주의 필요”
정치권이 소극적인 의결권 행사 방침으로 선회한 것은 현행 자본시장법상 주주권을 강화하면 국민연금의 공시 의무가 강화돼 주식시장의 혼란을 초래할 위험이 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현행법상 단일 기업 지분의 5% 이상을 가진 주주, 10% 이상의 지분을 가진 대주주는 공시를 해야만 주주총회 소집, 이사 추천·해임 등의 적극적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다. 국민연금은 이날 새누리당 보고 자리에서 “법적 규정에 따라서 국민연금이 적극적으로 경영에 참여할 경우 빈번한 공시에 따른 포트폴리오 노출과 (일반 투자자들의) 추격 매매 등으로 운용상 심각한 제약이 발생할 수 있다”며 난색을 보인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국민연금이 보다 적극적인 주주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주문이 적잖아 논란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교수(경영학)는 “35만 명을 직간접적으로 고용한 롯데가 스스로 사태를 해결하지 못하고 국민 불안을 키웠다”며 “롯데가 국민연금의 개입을 자초했다”고 지적했다. 박경서 고려대 교수(경영학)는 “영미, 유럽 기관투자가들은 이미 주주행동주의로 기업 경영에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한발 뒤처져 있다”며 “지분 3% 안팎을 가진 30대 재벌 일가들이 절대적 경영권을 행사하는 상황에서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는 주주로서 정당한 권리이자 수탁자의 의무”라고 말했다.
실제 미국, 네덜란드, 캐나다 등에서는 연기금이 이사회 안건에 찬반표를 던지는 것을 넘어 사외이사 후보를 추천하거나 경영 관련 안건을 이사회에 상정하며 주주권을 적극적으로 행사하고 있다. ▼ “주주권 행사는 정당한 권리”… 폐쇄경영 견제 목소리 높아 ▼
‘국민연금 역할론’ 점화
미국의 캘리포니아공무원퇴직연금(캘퍼스)은 매년 지배구조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기업 명단을 공개할 정도다. ○ “국민연금 독립성 확보가 선결 조건”
하지만 연기금의 주주권 행사가 기업 부담 증가로 이어질 것이라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특히 정부나 정치권이 국민연금을 통해 기업 경영에 개입할 수 있다는 ‘연금 사회주의’ 논란이 커지고 있다. 정부가 대기업 견제 수단으로 연기금 주주권 행사 카드를 꺼낸다면 시장경제의 근간이 무너질 수 있다는 지적까지 나온다.
오정근 건국대 특임교수는 “국민연금 기금 규모가 앞으로 2500조 원까지 늘어날 텐데 그러면 사실상 국내 모든 대기업의 대주주가 국민연금이 될 것”이라며 “이런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를 강화하면 정부가 기업 경영에 개입할 위험성이 커진다”고 꼬집었다. 신석훈 전국경제인연합회 기업정책팀장은 “국민연금은 중립적 위치에서 ‘수익성 극대화’라는 본래 목적에 맞춰 운용돼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무엇보다 국민연금 자체의 지배구조 개편, 기금 운용의 투명성과 독립성 확보 없이는 연기금 주주권 행사의 부작용이 더 크다는 우려가 많다. 윤창현 교수는 “정치권이 먼저 나서서 재벌 개혁 이슈로 다룰 것이 아니라 국민연금이 독립성, 자율성과 더불어 기업경영을 견제할 만한 전문성을 모두 갖춘 뒤 주주가치 증대를 위해 경영권에 개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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