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증권 중개인 24명이 미국 연방정부 채권의 위탁 수수료율을 합의하기 위해 미국 맨해튼 68번가 버튼우드 나무 아래에 모였다. 이들은 스스로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공동의 규칙을 만들었고 이 모임은 세계 최대 거래소인 뉴욕증권거래소(NYSE)의 기원이 됐다. 자본시장이 태동하던 시기의 거래소는 중개인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한 클럽의 성격이 강했다. 그러나 이런 사적 모임은 곧 ‘시장’으로 발전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시장은 기술 발전과 자본자유화의 흐름을 타고 세계로 뻗어 나가 스스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기업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최근 세계 거래소들의 변화 양상은 이런 거래소의 성장 과정을 반영하고 있다. 회원제 거래소 자체가 증시에 상장돼 인수합병(M&A)이 일어나고 주주 구성이 다변화되는 일련의 과정은 거래소가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하기 위해 치열한 생존경쟁을 벌인 결과다.
한국의 거래소는 이와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시작부터 정부 주도의 법정 독점 거래소였고 성장 과정도 정부의 자본시장 육성정책과 궤를 같이 해왔다. 이런 한국적인 상황에서 한국거래소는 우리 자본시장 발전의 역사를 앞장서 만들어 왔다. 매매 체결과 정보기술(IT) 운영의 안정성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으며 역동적인 파생상품 시장을 만들어 세계에서 한국 시장의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다만, 거래소가 과거의 성과에 안주해 자기만족에 빠져 있기엔 글로벌 자본시장에 부는 변화의 바람이 너무 거세다.
이제는 글로벌 자본시장의 개방도가 높아지고 경쟁이 심화되면서 시장의 자율과 혁신이 절실한 시대가 됐다. 또 갖가지 규제로 획일적 형태의 거래만 이뤄지던 시대에서 상품 개발과 거래 방식의 다양성, 창의성이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대로 변했다. 세계 여러 거래소가 기존의 거래소 개념 자체를 뒤흔드는 변화를 추구한 것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 경쟁력을 갖춰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거래소가 관행과 타성에 젖어 변화를 거부한다면 우리 자본시장은 글로벌 기업들과 투자자의 관심에서 멀어진 변방의 시장으로 퇴보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질문은 ‘거래소의 변화가 필요한가’가 아니라 ‘거래소가 어떻게 변화해야 하는가’이다. 정부는 지난달 2일 제 나름의 해법을 제시했다. 한국거래소를 지주사 구조로 전환해 각 시장이 독자적인 비전과 전략을 갖고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하는 한편 기업공개(IPO)를 통해 거래소를 완전한 민간 서비스 기관으로 전환하겠다는 것이다.
이번 방안은 다소 늦은 감이 있다. 거래소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선 좀 더 역동적이고 시장지향적인 조직문화와 경영방식이 필요하다. 기업과 투자자의 수요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다양한 상품을 공급해 더 많은 수익을 주주에게 돌려주려는 ‘기업가적 자세’도 갖춰야 한다. 지주사 구조로의 전환과 IPO를 통한 소유구조의 개혁은 독점적 공공기관에서 벗어나 시장형 기관으로 체질을 바꿔 나가기 위해 거래소에 필요한 가장 기본적인 처방이다. 하지만 이는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못 된다. 앞으로 거래소가 진정 글로벌 경쟁력을 갖춰 새로운 위상을 정립하기 위해서는 거래소 자체적으로 추가적인 노력을 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 나온 거래소 경쟁력 강화 방안은 10년 만에 찾아온 개혁의 기회다. 이번 개혁이 한국거래소와 우리 자본시장이 ‘퀀텀 점프’를 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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