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 교통환경연구소 A 연구원은 수입 자동차 업체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다. 환경 인증 권한을 쥐고 있던 그가 특별한 이유 없이 인증서 발급을 미루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해외에서 생산된 자동차를 국내로 들여오기 위해선 배기가스와 소음이 기준치에 부합하는지 당국으로부터 인증받아야 한다. 큰 하자가 없을 경우 15일 이내에 인증하도록 규정돼 있다.
인허가가 하루씩 늦어질 때마다 손해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다 보니 수입 차 업체들은 A 연구원을 상대로 필사적인 로비를 벌였다. 그 과정에서 ‘급행료’로 거액의 금품 제공과 접대가 이뤄졌다. 무려 6년이나 지속된 그의 ‘갑질’은 올해 6월 한 수입 차 업체가 주한유럽연합대표부에 신고하면서 끝났다. A 연구원은 구속된 상태에서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
○ 인허가는 ‘세월아 네월아’
농림축산식품부 산하 농림축산검역본부 소속 공무원 B 씨는 지난해 9월 동물용 탈취제를 제조하는 한 업체로부터 제조업 신고 서류를 받았다. 하지만 B 씨는 해당 서류를 두 달간 접수하지 않았다. 해당 업체 측에서 “처리가 늦어지면 업체가 파산할 수 있다”며 호소했지만 B 씨는 “그건 그쪽 사정”이라고 대응했다. 한술 더 떠 B 씨는 “현재 100여 건의 민원을 처리하고 있는데, 해당 업체들로부터 먼저 진행해도 된다는 동의를 받아오면 우선 처리해주겠다”고도 했다. 이 업체 대표는 “안 해 주겠다는 말로 들렸다”고 말했다.
감사원 감사에 B 씨가 적발되자 농림축산검역본부는 이 제조업체에 신고증을 발급했다. 두 달 동안 떠돌던 신고증이 발급되는 데 걸린 기간은 단 9일이었다. 감사원은 농림부에 B 씨의 징계를 요구한 상태다.
이처럼 정부,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이 각종 인허가권을 무기로 민간에 ‘갑질’을 하는 일이 적지 않다. 빨리 처리될 수 있는 민원도 굳이 기한을 꽉 채우는 일이 많다. 서류상의 사소한 미비점을 들어 민원을 돌려보내는 식으로 인허가를 차일피일 미루기도 한다. 건물 준공 검수 과정에서 각종 이유를 들어 검수를 지연시키는 일도 적지 않다. 지역주택조합 관계자는 “일부 지자체는 인허가를 내주는 대가로 자신들이 주관한 행사의 티켓을 구매해 달라고 요청하는 일도 있다”고 귀띔했다.
○ 너무 낮은 공사비에 유찰 증가
국내 건설시장에서 관급 공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해 수주 기준으로 40%에 이른다. 많은 건설사가 관급 공사에 의존하다 보니 자연스레 지자체와 공공기관 같은 발주 기관은 ‘갑’이, 건설사는 ‘을’이 되는 구조가 형성된다.
이 때문에 발주 기관의 횡포가 잦다는 건설사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는다. 발주 기관이 책임지는 토지 수용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공사 기간이 연장돼도 그로 인한 비용 부담은 고스란히 건설사가 떠맡는다. 공사 예산이 적게 배정되는 바람에 공사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도 건설사가 책임져야 한다. 대한상공회의소가 관급 공사 시장에서 발주 기관의 ‘갑질’을 당한 경험이 있는 160개 건설사를 상대로 실시한 5월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불합리한 계약 체결(37.0%) △합의 사항 미준수(33.4%) △계약에 없는 부당한 요구(29.3%) 등이 대표적인 부당 행위로 꼽혔다.
특히 공사비를 너무 낮게 책정하는 바람에 계약 자체가 체결되지 않는 사례가 늘고 있다. 지난해 관급 공사 시장에서 설계, 시공 등을 건설사가 일괄 책임지는 입찰 방식인 턴키공사와 같은 기술형 입찰에서 전체 발주 건수의 64.5%에 이르는 20건이 유찰됐다. 발주 기관이 제시하는 공사비가 너무 낮았기 때문이다. 유찰된 공사의 총 규모만 2조3000억 원에 이른다.
이런 구조 때문에 건설사들은 담합의 유혹에 넘어가기도 한다. 2009∼2012년 4대 강 공사 등 대형 관급 공사에서 78개 건설사가 담합 혐의로 공정거래위원회에 적발돼 총 1조3000억 원에 육박하는 과징금 처벌을 받았다. 건설업계 관계자는 “건설사들이 담합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가는 현행 관급 공사의 거래 행태를 개선하는 게 시급하다”고 호소했다.
○ 과도한 기부 요구에 가슴앓이
중견 주택 건설 업체인 C사는 몇 년 전 지자체에 아파트 건설 승인을 요청했다가 사회복지회관 건립을 위한 터 5000m²를 기부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하지만 요구받은 복지회관 터가 아파트 건설 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C사는 난색을 표했다. 그러자 지자체는 사업허가를 지연시켰고 착공이 늦어져 손해가 커지자 C사는 요구받은 땅을 사서 기부했다.
건설사들은 이처럼 개발 사업 허가권을 쥔 지방정부가 과도한 기부를 요구하는 것이 큰 부담이라고 설명한다. 총사업비의 8∼10% 정도가 기부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D사는 한 지방 사업장에 들어간 기부액이 사업 이익의 80∼90%에 달해 다른 비용까지 고려할 경우 오히려 적자를 봤다고 했다. 10억 원의 이익이 남는 공사에 9억 원의 땅을 기부하도록 요구한 셈이다.
이병기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공무원들이 각종 인허가권을 통해 민간의 사업을 규제한다”며 “공무원 인사와 규제 혁파를 연계하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기부·채납 ::
건설사들이 지방자치단체에서 사업승인을 얻기 위해 사업용 토지 일부를 도시환경 개선이나 생활환경 기반시설 조성 등을 위해 무상 기부하는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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