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철소 실패땐 모두 우향우해 영일만 투신”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5일 03시 00분


[광복 70년/한국 기업史 명장면 10]<6>포스코 1970년 제철소 착공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현 포스코) 포항제철소 1기 착공식에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과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왼쪽부터)가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포스코그룹 제공
1970년 4월 1일 포항제철(현 포스코) 포항제철소 1기 착공식에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과 박정희 대통령, 김학렬 부총리(왼쪽부터)가 착공 버튼을 누르고 있다. 포스코그룹 제공
“남의 집 다 헐어 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포스코)가 설립된 지 7개월여 지난 1968년 11월 12일.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경북 영일만 포항제철소 건설 현장을 예고 없이 방문했다. 초가집을 밀어내고 잔해를 태우면서 생긴 연기와 모래먼지 속에서 박 전 대통령은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옆에 있던 박태준 당시 사장은 제철소를 기필코 성공시키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이듬해 1월 5개국 8개 회사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은 “경제성이 떨어진다”며 약속한 1억 달러(약 1190억 원)를 빌려주지 않겠다고 등을 돌렸다. 결국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가 포항제철소에 투입됐다. 박 명예회장은 당시 “실패하면 역사와 국민 앞에 씻을 수 없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 모두 우향우해 저 영일만에 몸을 던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우향우 정신’은 지금까지도 포스코의 도전정신으로 내려오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다른 산업에 기초 소재를 제공하는 철강 산업은 경제가 자립하기 위한 필수 산업이라고 인식했다. 이렇게 제철소 건설은 양질의 철강재로 국가에 기여한다는 ‘제철보국(製鐵報國)’ 의지로 시작됐다.

당시 포항제철은 각종 민원에 시달렸다. 박 명예회장은 민원에 대한 압력 배제, 설비 공급업자 선정에 대한 재량권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메모에 적어 박 전 대통령에게 건의했다. 박 전 대통령은 후일 ‘종이 마패’로 불린 이 메모에 친필 사인을 해 민원을 차단해줬다.

마침내 1970년 4월 1일. 영일만에서 연산 103만 t 규모의 포항제철소 1기 설비 착공식이 열렸다. 1973년 6월 9일엔 국내 최초의 용광로를 준공하며 쇳물을 뽑아냈고, 7월 3일엔 1기 설비를 준공했다. 통상 4, 5년 걸리는 제철소를 포항제철은 3년 3개월 만에 건설했다. 제철소 설립을 통해 한국 경제의 산업 구조는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으로 발돋움하게 됐다.

1978년 포항제철은 제2제철소 사업자로 선정됐다. 포항제철 임직원들은 전남 광양만에 제철소를 건설하기 위해 험한 파도, 매서운 바람과 싸우며 바다를 메우고 설비를 올렸다. 광양제철소는 1992년 10월 2일 1140만 t 규모 일관제철소로 준공됐다. 단일 규모로 세계 최대 제철소다. 광양제철소 준공을 계기로 포항제철소는 고급강 위주의 다품종 소량 생산에 집중하고, 광양제철소는 열연·냉연제품 위주의 소품종 대량생산에 주력할 수 있게 됐다.

영일만, 광양만의 기적으로 포스코는 지난해 연결 기준 연매출 65조 원, 연간 조강 생산량 세계 5위(4142만 t) 철강사로 성장했다.

강유현 기자 yhkang@donga.com
#제철소#우향우해#영일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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