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진단]김택진과 김정주의 아름다운 이별

송진흡 산업부 차장

지난주에 만난 게임업계 관계자에게서 깜짝 놀랄 만한 얘기를 하나 들었다. 경영권 분쟁을 벌이고 있는 김택진 엔씨소프트 대표와 김정주 NXC(넥슨의 지주회사) 대표가 최근 미국에서 회동을 추진했다는 것이었다. 그는 “두 사람의 일정이 어긋나 실제 만남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올해 1월 경영권 분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 접촉한 것”이라고 귀띔했다.

국내 게임업계에서는 두 사람이 만남을 시도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경영권 분쟁 초기 격앙됐던 분위기가 다소 누그러진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나온다. 김정주 대표가 김택진 대표에게 경영권 참여 선언이 불가피했다는 점을 직간접으로 설명하는 등 적극적인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실제로 넥슨 측은 엔씨소프트 측에 얘기가 들어가도록 하기 위해 게임업계 관계자나 기자들에게 경영권을 빼앗으려는 의도는 없었다는 점을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있다. 엔씨소프트 지분 14.68%를 보유한 넥슨일본법인이 일본 증시에 상장된 업체인 만큼 실적이 나빠진 엔씨소프트에 대해 별다른 액션을 취하지 않으면 나중에 일본인 주주들이 경영진에 대한 배임을 거론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인인 넥슨일본법인 대표는 자신에게 배임죄가 적용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김정주 대표에게 ‘결단’을 내릴 것을 강력히 요청했다고 넥슨은 강조하고 있다. 경영권을 얻기보다는 배임죄를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는 점을 내세우는 것이다.

경영권 분쟁 이후 반목하던 두 사람 사이에서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면서 엔씨소프트 주가가 급격히 떨어졌다. 이달 1일에는 엔씨소프트 종가가 20만500원으로 전날 대비 8.24% 떨어졌다. 게임업계에서 최대 주주 넥슨이 지분(15.08%)을 모두 되팔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면서 인수합병(M&A) 이슈를 통해 차익을 얻으려던 투자자들이 매물을 쏟아 낸 결과다.

한국거래소가 곧바로 엔씨소프트에 ‘최대주주 지분 매각 추진설’에 대한 조회 공시를 요구했다. 엔씨소프트는 “최대 주주인 넥슨으로부터 조회 공시 사항을 포함해 그동안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나 현재 확정된 내용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받았다”고 답변했다. 증시 주변이나 게임 업계에서는 넥슨이 내놓은 해명에서 ‘미확정’보다는 ‘검토’라는 말에 주목하고 있다. 넥슨이 최근 들어 엔씨소프트에 직간접으로 화해 메시지를 보낸 것과 별개로 엔씨소프트 지분 15.08%(넥슨일본법인 14.68%+넥슨한국 0.4%)를 계속 보유하는 것 자체가 별다른 실익이 없다는 점에서다. 엔씨소프트가 올해 2월 방준혁 넷마블게임즈 이사회 의장을 사실상 ‘백기사’로 끌어들인 게 가장 큰 이유다. 엔씨소프트가 자사주를 넷마블게임즈에 넘겨 우호 지분 18.9%를 확보한 만큼 넥슨이 경영권을 넘볼 여지가 사실상 없어졌다. 여기에다 두 회사가 공동으로 추진하던 게임 개발 프로젝트도 중단된 만큼 넥슨으로서는 실질적인 경영 권한도 없을 뿐 아니라 사업적 시너지도 없는 지분을 더 갖고 있을 필요가 없는 상황이다.

게임 업계에서는 한국 게임 산업을 세계 수준으로 끌어올린 두 사람이 하루빨리 경영권 분쟁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지금처럼 어정쩡한 ‘동거’를 계속하면 엔씨소프트나 넥슨 모두에 득이 될 게 없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 게임 업체들이 막대한 자본을 무기로 빠른 속도로 글로벌 시장을 잠식하고 있는 상황에서 국내 게임 업계를 이끄는 두 회사가 ‘게임 개발’보다는 ‘경영권 싸움’에 정신이 팔리면 ‘남 좋은 일’만 시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김정주 대표와 김택진 대표는 서울대 공대 1년 선후배 사이다. 한 살 어린 김정주 대표가 김택진 대표를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했다. 경영권 분쟁의 불씨가 되기는 했지만 한때 미국 게임사 ‘EA(일렉트로닉아츠)’를 공동으로 인수하는 방안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화해 분위기가 감지되고는 있지만 경영권 분쟁 이전으로 돌아가기에는 간극이 너무 커졌다는 것이다.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는 얘기가 있다.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지분 정리를 통한 ‘아름다운 이별’로 마무리하는 게 두 사람은 물론이고 투자자나 게임 업계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다.

송진흡 산업부 차장 jinhup@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