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업계 ‘립스틱 군단’… 실리콘밸리도 손짓

ICT 스타트업, 여성CEO 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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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윤정 코노랩스 대표(43·여)는 1995년 지금은 카카오가 된 다음커뮤니케이션에 입사했다. 입사 당시 사번은 7번으로 창업 멤버를 제외하고는 가장 빠른 번호였다. 사실상 다음의 첫 번째 사원이었던 셈이다. 민 대표는 ‘다음 카페’와 블로그 서비스인 ‘티스토리’ 등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을 개발했다.

지난해 9월 다음을 그만둔 뒤 민 대표는 스케줄 관리 스타트업인 코노랩스를 창업했다. 같은 해 11월 하와이 언어로 ‘초대’라는 뜻인 ‘코노’ 서비스를 내놨다. 창업 이후 1년도 채 안 됐지만 미국 벤처캐피털(VC) ‘500 Startups’를 비롯해 국내외에서 3억5000만 원 규모의 투자를 이끌어낼 만큼 유망한 스타트업이 됐다.

여성 벤처기업인의 약진이 두드러지고 있다. 24일 한국여성벤처협회에 따르면 2007년 501개에 불과하던 여성 벤처기업(여성이 창업한 벤처기업) 수는 2015년 6월 말 현재 2481개로 약 5배로 늘어났다. 협회 관계자는 “그동안 제조업이나 하드웨어 부문에 치중돼 왔던 창업의 패러다임이 정보통신기술(ICT) 분야로 옮겨가면서 여성 벤처인들의 업무 경험과 감성 경영이 빛을 발하고 있다”고 말했다.

○ 소수지만 끈끈한 언니 동생들

민 대표가 처음 스타트업 업계에 발을 디뎠을 때 손을 잡아준 이는 김호선 스파이카 대표(46·여)였다. 김 대표는 올해 초 한국과 미국 VC에서 총 21억 원 규모의 투자를 유치한 여성 벤처인이다. 창업 이전엔 삼성 반도체에서 일했고, 이후 관련 업계에서 스마트폰 상품 기획과 블루투스 마케팅 등을 맡았다. 2009년 스파이카를 창업해 대용량 파일 공유 서비스인 선샤인을 내놓으며 실리콘밸리에서도 주목받는 스타트업으로 성장시켰다.

민 대표는 창업을 준비하다 김 대표를 만나 언니 동생 사이가 됐다. 해외 투자 유치 과정에서 조언도 많이 받았다. 민 대표는 “여성 창업인들은 일단 수가 적다”며 “소수라는 게 단점이 되기도 하지만 일단 업계에서 여성 창업가를 만나면 금세 연대감이 끈끈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생활형 아이디어와 커뮤니티 문화가 장점

다음커뮤니케이션 최고운영자(COO)·부사장까지 지낸 문효은 여성기업가네트워크 대표(48·여)는 “ICT에 기반을 두지만 생활밀착형 아이디어들이 많다는 게 여성 벤처기업인들이 갖고 있는 강점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생활 소품과 쇼핑 플랫폼 등 실생활과 밀접한 시장에서 여성 벤처기업인들이 유리하다는 분석이다.

각종 커뮤니티 문화도 여성 벤처기업인이 늘어나는 또 다른 배경이 되고 있다.

여성기업가네트워크는 문 대표가 장영화 변호사(43·여), 엄윤미 씨프로그램 대표(39·여)와 함께 만든 비영리 단체다. 후배 여성 벤처인들을 지원할 목적으로 시작해 매달 80여 명의 여성 창업자 및 준비생, ICT 기업 여성 임원 등을 대상으로 사업 발표회를 개최한다. 지난해부터 모임을 시작했지만 벌써 회원이 1400명을 넘었다.

구글의 국내 인큐베이터인 ‘캠퍼스 서울’도 개관과 동시에 20∼40대 여성이 아기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창업 지원 프로그램인 맘스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세계 각국에서 여성 창업자를 지원하고 연결해주는 비영리단체인 걸스인테크(GIT)도 올해 초 서울에 한국 사무실을 열고 활동에 들어갔다.

○ ‘무늬만 여성 벤처기업’도 적지 않아

최근 들어 여성 벤처기업이 늘고 있지만 모두 순수한 여성 벤처기업은 아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가 공개경쟁입찰을 할 때 여성 벤처기업인에 주는 혜택을 노리고 대표이사 명의만 여성으로 하는 ‘사이비 여성 벤처기업’도 많기 때문이다. 한 벤처업계 관계자는 “실질적인 운영자가 남편임에도 대표이사 명의를 아내 이름으로 하는 등 허울만 여성 벤처기업인 곳도 적지 않다”고 귀띔했다.

여성 벤처의 양적·질적 증가를 위해 성공한 선배 여성 벤처인들의 리더십이 절실하다는 요구도 커지고 있다. 한국여성벤처협회 관계자는 “이제 국내에서도 조금씩 여성 벤처인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지만 아직 매출 1000억 원 기업 중 3곳만 여성이 최고경영자(CEO)인 만큼 가야 할 길이 멀다”며 “성공한 여성 벤처인들이 선배로서 여성 창업자들에게 멘토 역할을 해주는 자리가 많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곽도영 now@donga.com·신무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