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기술을 이용해 건강관리를 돕고 질병을 쉽게 진단하게 해주는 ‘디지털 헬스케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요즘은 사진 판독 기능을 가진 인공지능 컴퓨터가 사람보다 더 쉽게 암 조직을 찾아내기도 한다. 애플워치나 핏비트(Fitbit)처럼 운동량과 심장박동 등을 측정해주는 웨어러블 기기도 국내외에서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의료, 건강 관련 산업 환경에 대한 이해 없이 막연한 아이디어만 믿고, 혹은 뛰어난 의학적 효용에만 집중해서 사업에 뛰어들면 낭패를 보기 쉽다. 의료산업은 소비자뿐 아니라 병원, 의사, 보험회사, 규제당국 등 사업에서 고려해야 하는 이해관계자가 많다. 특히 병원과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다룬다는 점 때문에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 도입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혁신적인 기술로 좋은 제품을 만들면 팔리겠지’라는 생각이 통하지 않는 분야다.
의료분야의 스타트업은 보수적인 성향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를 모두 만족시켜야 하지만, 어려운 만큼 성공의 보상도 크다. DBR(동아비즈니스리뷰) 186호(10월 1호)에 실린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 성공 전략을 요약한다.
○ 의학적 효용보다 사람의 문제에 집중하라
가정에서 사용할 수 있는 수면 패턴 분석 장비를 만든 제오(Zeo)는 2011년 유명한 의료기기 회사인 존슨앤존슨 등으로부터 총 2700만 달러의 투자를 유치했다. 머리에 두르고 자면 수면 패턴을 측정하고 분석해 어떻게 잠을 자고 있는지 알려주고, 그에 맞게 편안한 빛과 소리를 내서 좀 더 쾌적하게 잘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제품이었다. 병원에 가지 않고도 신체 정보를 측정할 수 있고 이를 의학적으로 분석한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받았다.
하지만 제오는 재정적 어려움을 겪다가 2013년에 문을 닫았다. “당신은 잠을 잔다고 생각하지만 수면의학적으로 보면 양질의 수면을 취한 것이 아니다”라는 정도밖에 알려주지 못하는 것이 이 제품의 한계였다. 수면의 질이 나쁘면 굳이 이렇게 이야기해주지 않아도 당사자가 가장 잘 안다. 또 단순히 빛과 소리를 조절해 주는 것으로는 수면의 질을 개선하는 데 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장치만으로는 소비자에게 실질적인 가치를 제공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비자가 해결을 원하는 문제가 질병이 아닐 수도 있다. 혈액 검사로 심근경색 여부를 진단할 수 있는 특정 단백질 검사 장비를 만들어 가슴 통증이 있을 때 집에서도 손쉽게 쓸 수 있게 됐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데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심한 가슴통증이 있으면 검사 결과와 상관없이 무조건 응급실로 가야 한다. 다른 응급질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소비자에게 중요한 건 가슴 통증이라는 문제지 심근경색이라는 질병이 아니다. 이런 경우 질병을 진단하는 기술만으로는 성공적인 비즈니스를 만들기 어렵다. 소비자는 구체적인 대응책까지 원하기 때문이다. ○ 보험회사가 좋은 장비를 외면할 수도 있다
의료계에서 가장 흔한 지불 방식은 의료보험을 통한 지불이다. 지불하는 주체(보험회사)와 사용하는 주체(환자)가 다르기 때문에 환자에게 도움이 되어도 보험회사의 이해관계에 어긋나면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특히 현재의 의료 시스템에서 보험회사는 병원에서 검사를 제대로 시행하지 않고 수가를 요구하는 허위 청구가 발생할 가능성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
예를 들어 병원이 환자에게 MRI 검사를 시행하고 보험회사로부터 이에 대한 대가를 받기 위해서는 미리 정해져 있는 기준을 만족시키는 환자에게만 검사를 시행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의사가 내놓은 판독 결과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 이러다 보면 역설적이게도 가장 쉽고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장비가 보험회사로부터는 외면 받을 수도 있다. 그 장비로 제대로 검사했는지를 점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제너럴일렉트릭이 만든 휴대용 심장 초음파 기기 ‘브이스캔’은 기존 심장 초음파보다 화질이 다소 떨어지기는 하지만 의사가 가운 주머니에 넣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휴대가 간편하다. 심장병이 의심되는 환자에게 손쉽게 이용할 수 있고 기존 초음파 검사보다 비용이 적게 들어서 디지털 헬스케어 시대를 열어가는 제품으로 주목받았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사용이 간편하다는 사실 때문에 보험회사로부터 외면 받았다. 청진기를 사용할 때처럼 손쉽게 꺼내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예전 같으면 굳이 검사를 실시하지 않았을 환자에게도 이 기기를 사용할 수도 있다. 보험회사 입장에서는 의사가 미리 정해진 기준을 만족하는 환자에게만 사용했는지, 검사를 제대로 시행했는지를 추적하기가 어렵다. 결국 일본을 제외한 전 세계에서 보험 적용을 받지 못했고, 의료기관이나 국가기관에서 제한적으로 구매하는 데 그쳤다. ○ 병원과 의사도 비용을 감안할 수밖에 없다
공공병원마저 수지타산을 따져서 문을 닫는 현실에서 병원은 수익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보험 적용을 받지 않고 병원에서 사용하는 의료기기 중 다빈치(da Vinci) 수술 로봇의 경우 고가의 비급여 수술을 가능하게 해주어 추가 수익을 낼 수 있기 때문에 병원들이 앞 다투어 도입하고 있다. 하지만 비용만 들 뿐 뚜렷한 추가 수익을 낼 수 없는 기기의 도입은 망설일 수밖에 없다. 유리 앰플(주사약)을 깔 때 미세한 유리 조각이 약물에 섞이는 것을 막아주는 안전주사기가 시장에 나왔지만 보험 적용을 받지 못해서 일반 주사기보다 비싸기 때문에 병원들은 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구글이 만든 스마트 안경인 구글글라스를 의료 현장에 접목하려는 시도들이 이뤄진 바 있다. 수술실에서 의료진이 구글글라스를 사용하면 고개를 들거나 장비를 만지지 않아도 환자의 생체 징후와 CT, MRI 영상을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또 응급 구조사가 구글글라스를 착용하고 있으면 멀리 떨어져 있는 병원의 응급의학과 의사가 환자 상태를 확인하고 적절한 처치를 지시할 수도 있다. 그런데 구입비용 이상의 이익을 거둘 수 있다는 확신 없이 환자 진료에 도움이 된다는 효용만으로는 병원들이 구글글라스를 사용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그렇다고 의사들이 자비를 들여 사려하지도 않을 것이다. 최신 제품에 대한 수용도는 의사나 일반인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 신기술에 특별히 관심이 많은 소수의 의사를 제외하면 자비로 이런 기기를 사서 쓰는 경우는 드물다. 실제로 분당서울대병원은 2003년 개원 당시 직원들에게 당시 첨단 제품이었던 PDA폰을 지급하고 병원 전자의무기록의 내용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는데 예상보다 적은 수의 의료진이 이를 사용했다. 일반인들이 쉽게 사용하는 장비가 아니면 의사들 역시 손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다.
김치원 서울와이즈요양병원 원장 doc4doc2011@gmail.com 정리=조진서 기자 cj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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