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미국 경제 전문지 ‘포천’이 선정한 ‘올해 최고의 지도자’에서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2위에 올랐다. 1위는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 3위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임을 감안하면 뜻밖의 결과다.
4년 전 드라기 총재의 취임을 바라보는 시선은 곱지 않았다. 그는 유럽 재정위기 진원지 중 하나로 꼽힌 이탈리아 출신이며, 미국 월가의 거대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 부회장을 맡은 전력도 있다. 하지만 드라기 총재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과감한 양적 완화로 시장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해 세간의 우려를 불식시켰다.
드라기 총재가 유로존이라는 거대시장의 통화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시장 경험을 통해 축적한 ‘디테일(detail)’이라는 힘 때문이다. 투자은행 출신이라는 꼬리표가 오히려 “자본시장을 이해하고 있다”는 강점으로 탈바꿈했다.
각국 통화정책기구에서 자본시장 전문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크 카니 영국중앙은행(BOE) 총재도 골드만삭스 출신이다. 제롬 파월 미국연방준비제도(연준·Fed) 이사는 미국계 거대 사모펀드인 칼라일그룹의 파트너였다. 이 기구들은 다양한 배경지식을 가진 전문가들의 협업이 통화정책에 대한 신뢰도를 높인다는 사실을 일찍 깨달았다.
한국의 금융통화위원회는 안타깝게도 이런 측면에서 낙제점을 면하기 어려울 것 같다. 1998년 이후 선임된 위원의 70% 이상이 한국은행 또는 고위 관료 출신이다. 스케일(규모)에 능한 거시경제 전문가는 많지만 시장의 디테일을 꿰뚫어 볼 전문가를 찾아보긴 어렵다. 현행법상 금통위원에는 당연직 위원인 한은 총재와 부총재 외에 한은 총재가 추천하는 1인이 포함된다. 전체 위원 7인 중 3인이 한은의 영향을 받는 상황에서 다양한 분야의 의견 수렴은 요원하다.
특히 금통위원 중 자본시장 전문가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은 우려스럽다. 자본시장은 은행과 함께 금융의 양대 축을 이룬다. 한국 자본시장은 최근 괄목할 만한 성장을 하고 있다. 금융투자 자산 규모는 예금의 84%에 육박하고, 자본시장을 통한 기업의 자금조달 규모는 은행 대출의 73%까지 성장했다. 통화정책의 영향력을 감안할 때 자본시장은 은행과 동일선상에서 고려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금통위원에 대한 증권업협회장(현 금융투자협회장)의 추천권은 2003년에 폐지됐다. 제도 변경이나 변경 필요성에 대한 논의도 없었다. 현재 한은 총재, 부총재 외 5명의 금통위원은 한은,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대한상공회의소, 전국은행연합회의 추천을 거쳐 대통령이 임명한다. 민간 추천제도의 도입 취지가 통화정책을 수립할 때 경제계와의 소통을 강화하려는 데 있었다면, 실물경제(대한상의 추천) 간접금융시장(은행연합회 추천)과 함께 직접금융시장을 대표하는 인물을 추천할 수 있도록 기존 제도를 유지했어야 했다.
통화정책을 수립할 때 경제 전반을 개괄하는 안목은 중요하다. 하지만 금융의 고리가 복잡하게 얽힌 21세기에는 스케일을 조율하는 능력만큼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안목도 중요하다. 금통위에 자본시장 전문가가 반드시 포함되어야 하는 이유다. 우리 통화정책도 이제 스케일과 디테일을 함께 고려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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