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초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아파트 경비실에 포도상자 십여 개가 배달됐다. 업계 수위를 다투는 대형 건설사가 이 아파트의 재건축 조합원들에게 보낸 ‘추석 선물’이었다. 이 건설사가 선물을 돌린 이유는 조합원들이 조만간 재건축사업 시공사를 선정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민들은 “공정한 선정에 방해된다”며 포도상자를 받지 않고 경비실에 그대로 쌓아뒀다.
19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서울 강남권 ‘노른자위’ 단지들의 재건축사업을 둘러싸고 건설사들 사이의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주민들에게 선물 공세를 펴는가 하면 일부 업체는 단지 주변 공인중개사들까지 포섭하고 있다. 단지에 살지 않는 조합원들이 주로 공인중개사들로부터 정보를 얻기 때문에 이들도 ‘관리’ 대상인 것이다.
건설사들이 이처럼 강남 재건축 사업수주에 목을 매는 것은 사업의 안정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업이 지연되거나 분양에 실패할 위험이 다른 사업장에 비해 적은 데다 도로, 학교 등 기반시설이 이미 완성돼 있어 비용 부담이 적은 편이다.
실제 올해 서울 강남권에서 분양된 재건축 아파트들의 분양가는 3.3m²당 최고 4000만 원이나 됐지만 모두 ‘완판’됐다. 내년까지 시공사를 선정할 ‘무지개아파트(서초동)’ ‘반포주공1단지’ ‘신반포15차(이상 서초구 반포동)’ 등도 교통·학군·생활편의의 3박자를 갖춘 곳들이어서 완판될 가능성이 높다.
분양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한동안 줄었던 주택사업 비중이 다시 늘어난 점도 재건축 수주전이 치열해진 원인이다. 대한건설협회에 따르면 건설사들의 국내 건설 수주액 중 주택건축사업의 비중은 지난해 상반기(1∼6월) 32.6%에서 올해 상반기 41.5%로 늘었다. 김덕례 주택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건설사들은 전국 주택시장을 선도하는 강남 중심부에 자사의 대표 브랜드 단지를 지어 다른 지역 분양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하려 한다”고 설명했다.
최근 수주전이 가장 치열한 곳은 19개 건설사가 참여한 가운데 13일 현장설명회가 열린 서초동의 무지개아파트다. 총 1489채로 재건축될 이곳은 내년까지 시공사 입찰 공고를 낼 강남권 재건축 단지 중 가장 규모가 크다.
현장설명회에 참석했던 GS건설은 올해 1∼9월 국내 업체 중 가장 많은 주택정비사업 수주실적(6조8579억 원)을 올린 점을 강조하고 있다. 축적된 재건축 노하우로 주변의 재건축 아파트들보다 높은 품질의 아파트를 선보이겠다고 주민들을 설득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브랜드 타운’ 효과를 강조하고 있다. 삼성물산은 이미 인근 우성 1·2·3차 재건축 사업을 따냈기 때문에 이 단지만 수주하면 강남역 일대에 5000채 규모의 ‘래미안’ 단지를 완성하게 된다.
이처럼 건설사들이 경쟁적으로 입찰 단가를 낮추거나 주택 품질을 높이면서 재건축조합원들은 속으로 활짝 웃고 있다. 조합들은 ‘지하주차장 크기를 넓혀라’ ‘실내 마감재를 고급스럽게 마무리하라’ 등 까다로운 입찰 조건을 내걸기도 한다. 김현아 건설산업연구원 건설경제연구실장은 “일부 사업장의 원가율(공사 대금 대비 원가 비율)이 100%에 달할 정도로 건설사 간 출혈 경쟁이 심하다”며 “조합원들은 재건축 분담금을 낮추게 돼 이득”이라고 말했다.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한 재건축조합 관계자는 “건설사들이 홍보전에 쏟은 돈을 결국 공사비로 메우려 하지 않겠느냐”며 “이 때문에 조합원 개인에게 선물을 돌리거나 개별 홍보를 하는 업체에 대해 경고를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서울시 관계자는 “주민에 대한 금품 살포는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상 중대한 범죄”라며 “적발되는 회사는 향후 다른 단지 재건축 사업 입찰도 제한된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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