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장’이라고 하면 나이 든 사람들이 장사하고,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주로 가는 곳이란 이미지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최근 감각 있는 청년 상인들이 시장으로 들어오면서 오랜 전통에 활력과 아이디어가 더해지고 있습니다. 이번 회부터는 전국 각지의 젊은 상인들이 어떻게 소비자들의 마음을 얻고 있는지, 그들의 활약상을 소개합니다.》
임신부 고객은 이 옷, 저 옷을 한참 구경했다. 옷걸이에 걸린 예쁜 옷들이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망설이는 손님에게 ‘601빅사이즈’ 사장인 성선미 씨(38)가 다가갔다. “지금 보신 옷, A라인이긴 한데 신축성이 좀 떨어져요. 앞으로 점점 배가 더 부를 테니까 이 상품으로 한번 보시면 어떨까요?”
임신 6개월째에 접어들었다는 예비 엄마의 얼굴이 환해졌다.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실은 제가 사촌 결혼식장에 입고 갈 옷이 없어서요.” 성 씨는 얼굴과 체형을 살핀 후 “이 옷은 아이를 출산한 후에도 입을 수 있다”며 여성스러운 디자인의 원피스와 레깅스를 권해줬다.
○ “출산 후 옷 입을 때 고민, 잘 알죠!”
15일 찾아간 경기 파주시 파주금촌통일시장에 위치한 ‘601빅사이즈’. 말 그대로 ‘빅 사이즈(big size)’들을 위한 천국이다. 쇼윈도와 판매대에는 가을을 맞아 검은색 흰색 회색 등 기본 컬러를 중심으로 한 옷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매장이 크진 않지만 임산부 손님들로 붐볐다.
보통 ‘큰 사이즈’라고 하면 펑퍼짐한 디자인일 것이라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이 가게의 상품들은 그런 편견을 깬다. 코르사주와 레이스를 활용한 여성스러운 원피스부터, 단순하지만 귀여운 느낌이 드는 청소재 의류까지 다양하게 있었다. 성 사장은 “사이즈가 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빅 사이즈’ 체형인 고객들의 고민을 반영하면서 단점을 보완해주는 예쁜 옷이냐가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원래 그는 인쇄 기계와 특수인쇄를 연구하는 연구원이었다. 남성 중심의 직장 문화에서 당찬 추진력을 인정받았다. 현장을 뛰어다니는 그를 보면서 동료들이 붙인 별명이 ‘불도저 차장’이었다.
그러나 2006년 결혼하고 임신과 출산을 겪으면서 고민이 시작됐다. 큰딸(7)을 생후 4개월 만에 맡기고, 그 뒤에 아들(6)도 출산휴가가 끝나고 서둘러 어린이집에 맡겼다. 잔병치레를 하는 아이들 때문에 병원 방문이 잦다 보니 회사에서는 “이번에는 또 누가 아파서 일찍 퇴근해야 하는데?”라는 이야기를 듣기 일쑤였다. 어린이집 앞에서 “들어가기 싫다”며 우는 아이들을 보며 죄책감도 컸다. 결국 2011년 회사를 그만뒀다.
회사를 그만두고 3개월. 아이들을 업고 전통시장을 찾았을 때였다. ‘내가 옷을 팔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구제 옷을 팔았다. 그런데 날씬한 여성들이 입는 44·55·66 사이즈 옷을 보니 ‘아니, 이걸 누구에게 입으라는 거지?’란 엉뚱한 반항심이 들었다. 성 씨는 “원래 옷가게 주인 취향 따라 공장에서 들여오는 옷도 다르다”며 깔깔 웃었다.
그 역시 출산 후 잘 들어가지 않는 뱃살 때문에 바지와 치마를 입지 못해 고생하던 기억이 생생했다. 뚱뚱하다고 예쁘게 보이고 싶은 욕구가 없는 게 아니다. 오히려 디자인이나 소재가 더 중요하다. 그러나 날씬한 여자들의 기준으로 만들어진 바지는 허벅지 안쪽이 끼어서 들어가지 않는다. 반대로 허벅지에 맞춰서 종아리와 발목 부분까지 펑퍼짐하게 크게 만든 옷은 전혀 예뻐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고민들을 반영해 ‘601빅사이즈’에서 판매하는 옷은 허벅지 안쪽과 팔뚝 부분의 신축성은 크게 늘린 반면에 다른 부분들은 몸에 좀 붙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허리 사이즈는 42까지 있는데 그 이상도 고객의 취향에 따라 늘려준다.
입소문을 타면서 가게는 번창했다. 아르바이트생을 구할 때 꼭 보는 성 씨만의 기준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마른 사람은 안 된다. ‘빅 사이즈’들의 심정을 모르기 때문에 옷을 권해줄 수 없다는 것이 이유다. 둘째,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예비 엄마가 많은 만큼 ‘아이들을 배려하고 임산부에게 친절한 심성’도 본다. 성 씨는 “나 역시 아이들을 업고 시장에서 가게를 하다 보니 시장 사람들이 처음에는 안쓰럽게 보기도 했다”며 “옷 고를 틈도 없이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는 엄마들이 우리 가게에서는 마음 편하게 천천히 쇼핑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한다”고 말했다.
○ “돌이었던 아기가 결혼반지 맞추러 오네요”
파주금촌통일시장에는 이 지역의 역사를 고스란히 품은 귀금속 가게가 있다. 1977년부터 파주시 명동길을 지켜온 ‘골드뱅크’(구 승우당)다. 파주에서 태어나고 자란 아버지 마원일 씨(70)가 고생 끝에 시작한 귀금속 가게를 2008년부터 아들인 마상수 씨(37)가 이어받았다. 2000년 영어로 된 상호가 인기를 끌면서 ‘골드뱅크’라는 이름을 ‘구 승우당’이란 이름과 함께 썼지만 아들 마상수 씨는 올해 안에 간판을 ‘승우당’으로 바꿀 예정이다. 오랫동안 파주지역 사람들의 기쁨과 삶을 함께해 온 만큼 오래된 전통과 가치를 지키고 싶다는 뜻에서다. 그래서인지 이 가게에는 ‘인연을 순금처럼’이라는 말이 크게 붙어 있었다.
“30년 넘게 한자리를 지키다 보니 아이 돌반지를 해주고 싶다며 사 갔던 엄마가, 이제는 흰머리가 난 중년 여인이 되어 딸과 함께 나타나기도 해요. 돌반지를 리세팅해 결혼반지로 만들어 주고 싶다는 말을 하면서요. 이렇게 한 가족의 기쁨의 역사를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이 우리 가게의 자랑이죠.”
화려함보다는 친근함을 내세우는 것도 ‘골드뱅크’의 자랑이다. 같은 공장에서 제작된 상품도 백화점으로 들어가면 수수료 때문에 값이 올라간다. 그에 비해 전통시장에 위치한 상점들에서는 훨씬 합리적인 가격에 살 수 있다. 선뜻 구경하기가 망설여지는 백화점과는 달리 이곳은 중산층과 소시민 다수를 위한 곳이기도 하다.
파주에 외국인 노동자가 많아지면서 귀금속 가게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동남아 사람들은 금을 매우 소중하게 여긴다. 순금으로 된 제품을 특히 선호한다. 가족들을 위한 선물을 고르기 위해 가게에 들어오는 외국인들의 표정은 무척 상기되어 있다. ‘골드뱅크’는 단순히 귀금속을 파는 것이 아니라 가족을 위한 꿈과 희망을 파는 곳인 셈이다.
성선미 씨와 마상수 씨 같은 젊은 30대 사장님들이 많아지면서 시장에도 활기가 더해졌다. 전통시장이라고 하면 나이 든 사람들이 가게를 운영하고, 노인들만 가는 곳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젊은 상인들의 감각이 뒷받침되면 유동인구의 평균 연령이 확 내려간다.
파주시 금촌동에는 전통시장, 명동로, 문화로 등 3개의 시장이 있는데 이 세 곳이 묶여 ‘문화관광형시장’으로 선정됐다. 청년 상인들은 시장 상권 자체를 살리고, ‘시민들에게 먼저 한 발 더 다가서자’며 좋은 아이디어도 많이 낸다.
그 결실로 11월 7일과 21일에는 토요장터가 열린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명동로 200여 m에 달하는 곳에서 자릿세를 받지 않고 물건을 팔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핵심이다. 일반 시민들도 벼룩시장처럼 자신이 갖고 있는 물건을 팔 수 있고, 인근 다문화센터나 외국인들도 장터에 참여할 수 있다. 11월 이후 겨울은 쉬고, 따뜻한 봄이 오는 3월부터 정례화할 방침이다.
장기적으로는 상인들이 공연행사를 직접 할 수 있도록 교육받을 계획이다. 연예인들이 출연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으는 일회성 행사가 아니라 파주금촌통일시장만의 콘텐츠와 볼거리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마 씨는 “파주라는 지리적 특성이 주는 상징성이 있는 만큼 ‘통일’이라는 주제로 콘텐츠를 만들어 우리 시장만의 강점을 만드는 것이 상인회의 목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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