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은 훔쳐도 자세는 훔칠 수 없어”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27일 03시 00분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서성환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1>소년과 어머니의 부엌

예성강 줄기의 상로를 수도 없이 오가며 동백기름을 만들어 팔던 장원의 젊은 시절 모습. 아모레퍼시픽 제공
예성강 줄기의 상로를 수도 없이 오가며 동백기름을 만들어 팔던 장원의 젊은 시절 모습. 아모레퍼시픽 제공
《 아모레퍼시픽의 창업자 고 장원 서성환(粧源 徐成煥) 회장(1924∼2003)은 국내 화장품 산업의 선구자다. 불모지였던 국내 화장품 산업에서 아모레퍼시픽을 의(義), 신(信), 실(實)로 꼽히는 개성상인의 삼도훈(三道訓)으로 이끌어 글로벌 기업의 초석을 놓았다. 올해로 창업 70주년을 맞는 아모레퍼시픽의 오늘날이 있기까지 서성환 회장이 겪었던 고난과 좌절, 희망의 여정을 총 10회에 걸쳐 되짚어 본다. 》

‘냄새나는 걸인을 저렇게까지 꼭 집에 들여야 하나?’

윤독정 여사는 식구들의 불만도 못 들은 체하고 동냥 온 걸인에게 따로 차린 밥상을 선뜻 내어주곤 했다. 베풀기를 좋아하는 타고난 마음 씀씀이 때문이었다. 장원 서성환 회장은 그런 어머니 윤 여사와 평범한 농부였던 아버지 사이에서 1924년 3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가 일곱 살 되던 해 가족은 황해도 평산군에서 개성으로 이주했다. 생활력이 강했던 윤 여사는 번창한 상업 도시 개성에서 등잔기름, 머릿기름 등을 도매상에서 받아와 이문을 남기고 팔았다. 일이 손에 익자 남의 물건을 받는 것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았다. 그녀는 당시 여성의 윤기 흐르는 까만 머리카락을 가꾸는 데 필수품이었던 동백 머릿기름을 직접 만들어 팔기로 했다.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좋은 원료의 확보였는데, 윤 여사는 그동안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전국의 보부상으로부터 좋은 동백나무 열매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여기에 숙련한 실력과 신용도가 더해지며 윤 여사의 동백기름은 점점 입소문을 타고 전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창성상점’이라는 간판을 건 장원의 집에서 머릿기름을 팔던 그녀는 제품에 ‘창성당 제품’이라고 표기했다. 당시 최고급 화장품이라는 뜻으로 ‘당급 화장품’이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창성상점에서 만든 제품이 당급 화장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자신감의 표현이었다.

16세 때 중경보통학교를 졸업한 장원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가업을 돕기로 했다. 그의 첫 번째 임무는 원료와 자재 구매였다. 물자가 부족하고 귀하던 시절이라 원료 확보가 사업의 기초 능력인 셈이었는데, 어머니는 귀한 원료를 구하러 남대문시장의 거래처를 찾아가는 일을 아들 장원에게 맡겼다.

시장에 가는 날이면 장원은 도시락 세 개를 자전거에 단단히 묶고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길을 나서곤 했다. 가는 길에 날이 밝으면 도시락 하나를 먹고, 일을 마친 뒤 또 하나를 먹고, 돌아오는 길에 남은 하나를 먹었다. 이렇게 세끼를 식은 도시락으로 때우며 자전거로 오가는 길은 단순한 장삿길이 아니라 소년 장원에게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는 통로였고 흙과 바람, 자연을 만나고 사람을 사귀며 세상을 배우는 학교였다.

한 해 남짓 남대문시장을 오가면서 여유가 생긴 아들에게 어머니는 제조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인정과 따뜻한 성품으로 또 하나의 밥상을 준비하던 어머니의 부엌에서 그는 삶 전체를 함께한 화장품의 단초가 될 동백기름 제조법을 배웠다. 이때 그가 배운 것은 단순한 제조법이 아니라 제조에 임하는 자세였다. “기술은 훔쳐도 자세는 훔칠 수 없다”란 어머니의 말은 그의 철학이 됐다. 제조에 자신이 붙은 장원은 판매에도 뛰어들었다. 예성강 줄기를 따라 형성된 상로를 수없이 오갔던 장원은 그 길을 훗날 ‘상인의 길’이라고 회상한다.

정리=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서성환#평전#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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