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지하철 7호선 남구로역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서울 구로구 구로시장. 이곳엔 ‘구로 영프라쟈’라는 복고풍의 이름을 지닌 상가가 있다. 북적북적한 시장통에서 살짝 비켜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면 ‘영프라쟈’ 간판을 만날 수 있다. 겉은 여느 시장과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자 아기자기한 상점 간판, 야외 테이블,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셔터문 등 진정한 ‘젊은 광장(Young Plaza)’이 사람들을 맞이한다.
올해 1월 정식으로 문을 연 구로 영프라쟈는 점포 4개로 구성된 미니 상가다. 특색 있는 식료품을 파는 슈퍼마켓 ‘쾌슈퍼’, 김을 파는 ‘똥집맛나’가 있다. 점포의 주인은 모두 20, 30대 젊은 청년 상인들. 이 중 쾌슈퍼와 아트플라츠의 청년 상인들을 만나봤다. ○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변신한 슈퍼마켓
“세상에 부러울 것 없어라.”
지난달 23일 오후 찾은 쾌슈퍼의 점포 벽면에는 이런 문구로 된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었다. 이름부터 흥겨운 느낌이 드는 가게답게 특색이 가득 묻어났다. 베트남 쌀국수, 독일 대마맥주와 같은 외국산 식품뿐만 아니라 수제과일청, 검은콩가루 등 건강식품도 팔고 있다. 쾌슈퍼는 대학 동기인 변은지 씨(27·여)와 윤지혜 씨(28·여)가 오래전부터 함께 준비해 탄생한 슈퍼마켓이다. 어떻게 시작하게 됐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두 사람은 2008년 터키·이집트로 떠난 배낭여행 이야기부터 꺼냈다. 윤 씨는 “이집트의 슈퍼마켓에선 물건을 많이 사면 살수록 ‘욕심을 내서 물건을 산 것 아니냐’는 뜻으로 오히려 값을 더 비싸게 받는 것을 보고 놀랐다”면서 “슈퍼마켓에 그 나라의 삶과 철학이 들어 있다는 걸 알고 청년의 시각으로 만든 슈퍼마켓을 운영해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변 씨는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제품과 달리 이야기가 있는 식·음료품을 일부러 찾아 진열했다”며 “생산자를 알아볼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 덕분에 쾌슈퍼에 진열된 제품만 보는 데에도 위트가 넘쳤다. 인생이 재미없어서 인생에 잼을 처방한다는 콘셉트의 수제잼 ‘잼있는 인생’, ‘세월이 엿 먹일 때’나 ‘야근이 엿 먹일 때’와 같이 재미있는 제품명으로 출시한 엿 브랜드 ‘엿츠’ 등 시중에서 쉽게 찾아보지 못한 제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두 사람의 창업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건 아니다. 2010년 대학을 졸업한 이후 서울시 청년창업 프로그램인 ‘챌린지 1000 프로젝트’를 통해 세무 강의를 듣고 일찌감치 ‘쾌슈퍼’라는 이름으로 상표등록까지 마쳤다고 한다. 그렇지만 부족한 자본금 때문에 넓은 매장을 낸다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창업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광고회사, 공연기획사 등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며 사회 경험부터 쌓았다. 그러던 지난해부터 직접 만든 초와 디자인 엽서를 들고 벼룩시장에 나가 팔며 창업 계획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난해 10월 구로시장 영프라쟈를 통해 쾌슈퍼의 창업을 마침내 이룰 수 있었다.
쾌슈퍼는 ‘그로서란트(Grocerant)’를 지향한다. 식료품점(Grocery)과 음식점(Restaurant)의 합성어로 식료품을 맛보고 살 수 있도록 하는 점포를 뜻한다. 누구나 음식을 즐기고 맛볼 수 있는 개성 넘치는 공간이 되겠단 의미다. 그렇지만 두 사람의 꿈은 자신들의 개성을 극대화하는 것이 아닌 모두가 상생하는 시장에 있었다. 윤 씨는 “대학에서 광고를 전공했던 점을 살려, 차후엔 동네 다른 슈퍼마켓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프로젝트를 기획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 추억을 만들어주는 공간, 아트플라츠
쾌슈퍼의 바로 옆에는 꽃초상화와 음료를 파는 아트플라츠(Art Platz)가 있다. 아트플라츠는 예술을 뜻하는 영어 ‘Art’와 독일어로 거리를 나타내는 ‘Platz’를 합쳐 만든 말. 대학 선후배 사이인 김승현 씨(27)와 김유진 씨(24·여)가 전공(무대미술)을 살려 만든 이곳엔 초상화 액자로 가득하다.
아트플라츠의 주력 제품은 바로 꽃초상화다. 김유진 씨는 “초상화를 그려주는 곳은 많았지만 색다른 걸 찾다 보니 꽃을 넣은 초상화를 그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설명했다. 이곳에서 그려주는 초상화에는 압화(압축해서 말린 생화)가 장식으로 들어간다.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일이지만 김 씨는 오히려 더 행복하다고 설명했다. “방송국 드라마 세트를 만드는 일을 한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 일을 할수록 나만의 것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확고해졌다”며 현재에 만족감을 드러냈다.
직접 매장에서 초상화를 주문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고객들은 사진을 미리 전송하고 주문한 후 나중에 찾아가는 방식으로 구입한다. 아이의 성장과정을 담고자 하는 부모, 기념일 선물로 주문하는 연인이나 가족 등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김 씨는 “고객들이 사진을 보내면서 ‘이 사람은 나와 어떤 관계이고 어떤 성격이다’라며 사연을 말해준다”며 “그런 점에서 그림만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고 말했다.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묻는 질문에 김 씨는 “남편이 세상을 떠났는데 제대로 된 가족사진이 없다며 사진 몇 장을 들고 오신 어머니가 있었다”며 “그림으로나마 가족사진을 만들어 드린 게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대답했다.
▼최현호 영프라쟈 창업지원 사업단장 “지원 없어도 오래 살아남을 자생력 키울 것”▼
“지원이 없이도 매력적인 공간으로 남아 오래도록 장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저희의 목표입니다”
지난달 23일 구로시장에서 만난 최현호 구로시장 청년상인 창업지원사업단장(30)은 영프라쟈 프로젝트를 진행해 이루고픈 최종 목표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현재 영프라쟈가 구로구청, 구로시장 상인회 등의 지원을 받고 있지만 훗날 그런 지원 없이도 계속 번성해 나가길 바란다는 의미다.
구로시장은 인근의 구로공단이 번성하면서 1970, 80년대 호황을 누렸던 곳. 특히 한복과 포목 전문시장으로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1990년대 인근에 백화점이 생기고 접근성이 좋은 곳으로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쇠퇴기를 맞게 됐다. 하지만 현재 영프라쟈가 들어선 후로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
현재 영프라쟈에 입점한 점포들은 보증금과 월세를 한시적으로 지원받고 있지만, 내년이 되면 당장 지원 없이 자생할 수 있어야 한다. 최 단장은 이곳이 계속 번성해 나갈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는 “아직은 가게가 4개밖에 없어 손님이 적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2기 모집을 통해 12개의 점포가 영프라쟈 안으로 더 들어오면 매력이 살아나고 사람들의 인식도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최 단장은 “결국엔 상권 문화라는 것은 그 상권에 속한 사람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상인 공동체를 위하는 분위기가 형성될 때 청년상인 문화라는 것이 만들어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 단장은 영프라쟈가 ‘내 집 앞 재밌는 공간’으로 발전해 나가길 바란다고도 말했다. 요즘 젊은이들이 재밌는 공간을 찾아 멀리 나가 소비하는 행태를 지적한 것이다. 그는 “젊은이들은 강남, 홍대와 같은 번화가부터 최근 주목받고 있는 경리단길, 연남동 등지에 가서 소비를 한다”며 “영프라쟈가 더 많은 동네 주민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공교롭게도 영프라쟈에 입점할 2기 청년상인의 모집 공고를 낸 날이었다. 최 단장은 앞으로 뽑을 2기 점포로 음식점뿐만 아니라 다양한 업종을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역 주민을 위한 편의공간, 미용실, 만화방, 놀이방 등 다양한 창업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만 19∼39세의 구로시장 내 청년창업 희망자라면 누구나 지원이 가능하다. 지원은 이메일(youngplazaa@gmail.com) 혹은 구로구청 지역경제과를 방문해 이달 11일까지 신청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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