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대륙시장 열린다” 선견지명… 수교후 현지공장 세워 본격 진출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6일 03시 00분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서성환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
<9>세계를 향한 우보천리

대부분의 업체들이 상하이로 진출할 때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는 발상을 전환해 선양을 중국 진출의 첫 기지로 삼았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대부분의 업체들이 상하이로 진출할 때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는 발상을 전환해 선양을 중국 진출의 첫 기지로 삼았다. 아모레퍼시픽 제공
‘우보천리’라는 말이 있다. 소걸음으로 천리 길을 간다는 뜻이기도 하고, 천리 먼 길을 가려면 소걸음처럼 긴 호흡으로 걸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미지의 나라 중국 시장을 개척하던 시절, 서성환 당시 태평양 회장이 그랬다.

1976년 덩샤오핑의 등장으로 중국 내 이념 대결이 사라지고 실용의 시대가 열렸다. 세계 기업들이 앞다퉈 달려갔다. 중국은 생산공장으로도 소비시장으로도 매력적인 곳이었다. 그 역시 1980년대 후반이 되며 중국이 달라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임원들에게 개방에 대비해 두라고 여러 번 당부했다. 국교가 정상화되기 이전이었던 1990년대 초반부터 홍콩과 대만에 직원을 파견했다. 사전에 중국 진출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얼마 있지 않아 예상대로 중국과의 수교가 이뤄졌다. 하지만 사업 진출은 쉽지 않았다. 화장품은 다른 품목보다 규제 장벽도, 관세도 높았다. 방법은 현지에 생산 공장을 설립해 시장에 진출하는 것뿐이었다. 조사 팀을 파견해 검토한 결과, 상하이 진출이란 답이 나왔다. 상하이는 경제와 선진 문화의 중심이었으므로 세계 각지의 화장품 회사들도 일제히 상하이에 합작법인을 세우거나 생산 공장을 건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생각이 달랐다.

“상하이 말고 봉천(펑톈)으로 진출하는 게 좋을 것 같다.”

봉천은 선양의 옛 지명이다. 그가 징용됐을 당시 신의주를 거쳐 선양을 통과하는 강행군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선양을 지목한 이유가 단지 과거 기억 때문은 아니었다. 이미 베이징이나 상하이 같은 대도시는 시세이도나 크리스티앙디오르 같은 글로벌 기업들이 시장을 선점한 뒤였다. 반면 중국 동북 3성의 중심이 되는 선양은 상대적으로 경쟁사들의 관심 밖에 있어 안정적 진입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중국 심장부에서 사업을 하기 전에 시장을 이해하는 마케팅 학습장으로 이렇게 적당한 곳을 찾기 어려웠다. 결과적으로 이 전략은 적중했다. 처음부터 상하이로 들어간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은 반면 태평양은 상대적으로 중국에 대해 훨씬 깊이 알아가기 시작했다.

선양에 진출한 태평양은 동북 지역 최대 미용학교인 보암실업총공사와 1994년 2월 선양 경제기술개발구 안에 ‘태평양 보암화장품유한공사’를 설립하고 제품을 출시한다. 초기에는 판매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모레 화장품 한 세트의 값이 중국에서는 쌀 한 가마니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그는 먼 미래를 내다보고 마케팅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태평양은 선양 중싱백화점을 비롯해 10여 곳의 백화점에 입점하는 데 성공한다.

2년의 시간이 흐른 뒤에야 서서히 확장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선양에서의 사업이 안정화되자 태평양은 거점을 하나둘씩 확대해 1995년에는 다롄에, 1996년에는 창춘과 하얼빈에 진출했다. 국내에서 숨 가쁘게 달려왔던 태평양은 중국에서는 서서히 느린 걸음으로 움직였다. 굳이 지름길을 찾지 않고 서두르지도 않았다. 1990년대가 다 갈 때까지 장원과 태평양은 중국 대륙의 중심이 아닌 한 모퉁이에서 언젠가 타오르게 될 꿈의 불씨를 차근차근 피워 나갔다.

정리=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아모레퍼시픽#서성환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