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환 “녹차사업 성공해 국민기업 됩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1월 10일 03시 00분


[아모레퍼시픽 창업자 서성환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
<10·끝>아름다운 집념

제주의 명소가 된 ‘오설록 티뮤지엄’ 개관식 후 아버지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왼쪽)와 함께한 서경배 회장. 아모레퍼시픽 제공
제주의 명소가 된 ‘오설록 티뮤지엄’ 개관식 후 아버지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왼쪽)와 함께한 서경배 회장. 아모레퍼시픽 제공
1979년 어느 날, 서울 용산의 본사 사옥에서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 주재의 긴급회의가 열린다. 신규 사업에 관한 논의였다.

“차 사업을 하고 싶소. 녹차 사업이오. 당장 돈이 벌리는 사업이 아니란 건 누구보다 잘 알아요. 당분간 돈과는 상관없겠지만 성공한다면 태평양은 모든 국민에게 사랑받는 기업 이미지를 얻을 것이오.”

그는 해외 출장을 다닐 때마다 줄곧 그 나라의 식물원을 찾으며 식물과 인간, 문화가 만날 수 있는 장소를 직접 일구고 싶다는 꿈을 품었다. 녹차 사업은 그에게 돈 버는 사업이 아니었다. 오래 꿈꿔 온 문화 사업이었다. 녹차는 우리의 문화와 전통 그 자체였다.

그는 1961년부터 국내에서 식물을 재배할 여러 방안을 모색하던 중 그 분야에 남다른 열정을 갖고 있던 제주 농업학교 교사 허인옥 씨를 만났다. 허 씨와 함께 특용작물 재배 연구부터 차에 대한 의견을 나누면서 차 사업에 대한 소망은 점점 구체화됐다.

농화학을 전공한 서항원 이사를 회사 책임자로 정하고, 후에 일본 유학을 마치고 제주대 교수로 재직하게 된 허 씨와 연락을 취해 녹차 사업은 첫 삽을 뜨게 된다. 1979년 한라산 남서쪽 중턱에 위치한 도순다원의 시작이었다. 개간 작업을 시작하면서 장원은 1970년 초 화장품 원료 재배를 위해 전라도 화순 농장을 함께 일궜던 김원경 씨에게 실무를 맡겼다.

예상했던 것이지만 개간은 쉽지 않았다. 흙 대신 돌덩이만 가득했던 황무지에서 식수도 구하기 힘들어 물탱크를 설치하기 위해 손으로 부수며 땅을 파고, 퇴비를 구하기 위해 한여름에 오물 넘치는 양계장을 드나들었다.

1983년에 시작된 서광다원의 개간은 훨씬 힘들었다. 제주도에서 단 한 번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황무지인 곶자왈에 터를 닦아야 했다. 제주를 잘 아는 전문가 박문기 씨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밤이면 촛불을 켜야 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퇴비로 쓸 돼지 똥을 구하기 위해 아예 사육까지 해 가면서 공을 들였다. 그해 드디어 첫 찻잎을 수확하는 성과를 올린다. 태평양은 그해 이곳에서 딴 찻잎으로 ‘한라진수’, ‘삼다진수’, ‘설록 티백’ 등 다양한 신제품을 출시한다.

2000년대 하와이에 휴양차 머물며 파인애플 박물관을 둘러본 그는 국내에도 녹차박물관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들인 서경배 대표는 병중인 아버지의 간곡한 의지를 알아차린다. 녹차 사업은 창업주의 오랜 신념과 뚝심에서 시작되고 지속된 문화 사업이었다. 2001년 9월 남제주군 안덕면의 ‘오설록 티뮤지엄’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2003년 1월 9일 서성환 아모레퍼시픽 창업주는 화장품 사업을 끝까지 지키고, 어려운 이웃을 살펴 달라는 뜻을 남기고 그리운 어머니를 만나기 위한 먼 길을 떠났다. 그가 살아온 삶은 마치 그릇처럼 시대와 사회와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다.

나라 잃은 조선의 아들로 태어나 혼란스러운 해방정국 속에서도 개성상인의 삼도훈(三道訓)을 따르며 오늘의 아모레퍼시픽을 키워 낸 그는 늘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인류를 아름답게, 사회를 아름답게’라는 기업 슬로건에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그의 오랜 꿈과 집념이 그대로 담겨 있다.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란 다짐 역시 그런 바람의 또 다른 표현이었을 것이다.

정리=박선희 기자 teller@donga.com
#녹차#아모레퍼시픽#사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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