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3호/김창환의 통계 인사이트]
이쯤 해서 되짚어보는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
어렸을 때 나의 장래희망은 택시기사였다. 택시를 타면 멀미도 안 해 편하고 좋았다. 하지만 그 꿈을 오래 간직하지는 않았다. 1970년대 ‘국민학교’를 다닌 대다수가 그러했듯 대통령이 꿈이었고 좀 더 커서는 교사, 문학작가, 가톨릭 사제, 사회과학자로 꿈이 수없이 바뀌었다. 항상 무엇인가 되고 싶었던 것도, 뭔가를 이루고 싶었던 것도 아니다. 이루고 싶은 꿈조차 없이 살았던 기간도 상당하다.
박근혜 대통령의 선거 구호였던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는 각자가 원하는 바를 이루는 이상적인 사회를 의미했을 것이다. 간혹 박 대통령 당신의 꿈만 이루어지는 나라라는 비아냥거림도 있지만, 나는 이 구호가 상당히 괜찮은 슬로건이었다고 생각한다. 구체적으로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는 어떤 모습일까.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면
많은 사회사상가가 이상적인 사회 모습을 제시했다. 플라톤은 철인이 지배하는 사회, 루소는 불평등을 낳는 인위적인 시스템을 타파하고 모두가 평등한 자연상태를 이상적인 사회로 여겼다. 동서양 모두 소규모 공동체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그리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여러 주장이 있지만, 인간 본성에 대한 추상적인 가정 없이 누구나 알기 쉽게 구체적으로 이상적인 사회를 제시했던 사상가는 많지 않다.
그중 공산주의 사상가 칼 마르크스가 꿈꿨던 이상적인 사회는 “어느 누구도 한 가지 전문적인 활동 영역을 갖지 않고 저마다가 모두 원하는 분야에서 제 몫을 다할 수 있는 사회”로, “오늘은 이 일을 하고 또 내일은 저 일을 하는 식으로 아침엔 사냥을 하고, 오후엔 물고기를 잡으며, 또 저녁에는 가축을 몰고, 저녁식사 뒤에는 비평에 종사”하는 그런 사회다.
달리 말해 꿈이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어도 그 꿈을 이루는 데 별문제가 없는 사회다. 마르크스가 그린 이상적인 사회는 전체주의적 통제를 일삼는 사회가 아니라, 각 개인이 자신의 욕구를 이루는 데 제약이 없는 사회였다.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겠지만 ‘21세기 자본’을 쓴 토마 피케티도 비슷한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제시한다. 피케티가 말하는 이상적인 사회는 “모든 사람이 선생이었다가 학생이 되고, 독자였다가 필자가 되고, 관객이었다가 배우가 되고, 환자였다가 의사가 될 수 있는” 사회다.
피케티는 인류가 어떤 의미에서 이미 이런 사회로 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불평등 증가 문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부자가 소득을 독점하는 사회로 가고 있다고 암울하게 전망했던 피케티가, 자신의 책 한 장에서는 우리 사회가 희망찬 이상 사회로 가고 있다고 쓴 것이다.
피케티는 왜 이렇게 전망했을까. 이상적인 사회가 가능해지는 조건은 무엇일까. 피케티에 따르면 답은 아주 간단하다. 경제가 발전해 “거의 모든 일이 자동화”되는 것이다. 즉 생산성이 현재보다 훨씬 더 높아지고 경제가 고도로 발전해 각 개인이 생존을 위한 노동의 제약 없이 하고 싶은 일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으면 그 사회가 바로 이상적인 사회다. 피케티가 성장에 반대하는 양 많은 언론이 보도했지만, 정작 피케티는 고도 경제성장이 개인의 자유를 최대로 보장하는 사회를 이상적인 사회로 여긴다.
그렇다면 과연 피케티의 주장처럼 인류 사회는 이런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 미래를 전망하는 방법은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이다. 해방 후 한국인의 80%가 농림어업에 종사했지만, 1980년대에는 그 비중이 27%로, 지금은 6%로 줄었다. 19세기 미국 인구의 95%가 농민이었지만, 현재는 2% 미만의 인구가 농업에 종사한다. 경제발전은 구성원 대부분이 능력과 취향에 관계없이 평생을 농민으로 살던 사회를 기회에 따라 다양한 직업 선택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자본주의 산업사회로 바꿔놓았다. 직업 선택의 자유가 사실상 박탈된 농업사회에서 직업 선택의 자유가 있는 산업사회로의 이행을 가능케 했던 힘은 산업혁명으로 촉발한 급속한 경제성장이다.
경제발전이 위대한 진짜 이유
최근 논란이 됐던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앵거스 디턴의 ‘위대한 탈출’도 인류 사회가 경제발전과 더불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여러 증거를 제시한다. 예를 들어 경제발전이 지체된 저개발국가에서 태어난 많은 유아가 5세에 이르기 전 사망한다. 저개발국가 아이들은 직업 선택의 자유는커녕 생존확률이 계급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아직도 아프리카에서는 영아 1000명 중 130여 명이 5세 이전 사망한다. 반면 한국을 비롯한 선진국은 1000명 중 5명 정도만 5세 이전 사망한다. 계급에 따른 생존확률 격차도 적다. 경제발전과 더불어 인류가 영아 사망의 속박과 계급 조건의 제약으로부터 탈출해 더 많은 자유를 누리는 것, 바로 디턴이 얘기하는 ‘위대한 탈출’이다.
경제발전과 성장이 위대한 이유는 인간을 더 자유롭게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과 각 개인의 선택의 자유 확대가 같이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경제성장은 그 자체가 목적이 되거나 위대한 것이 아니라, 선택의 자유를 제약하는 외부 요인을 제거하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서, 여자라서, 장애인이라서, 나이가 많아서, 남들보다 두뇌가 뛰어나지 못해서, 성적 정체성이 남들과 달라서 등등의 이유가 삶의 제약이 되는 일이 점점 적어지는 사회로 나아갈 때, 그래서 모든 개인이 꿈을 이루기 쉬운 사회가 될 때 우리는 이상적인 사회에 한 발 더 다가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기준으로 볼 때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은 무척 우려스럽다. 경제성장과 더불어 직업 선택의 자유가 늘어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줄어들고 있다. 지난해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청소년이 가장 근무하고 싶은 직장은 국가기관(29%)이었다. 경제가 성장하면서 꿈이 다양해지기는커녕 미래를 불안해하는 청소년들의 꿈이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는 직업으로 한정되고 있다.
이러한 모순은 경제발전에 대해서는 절대다수가 동의하지만 경제발전이 개인의 자유 확대로 이어져야 한다는 데 그만큼 동의하지 않는 우리 사회의 자유주의 이념 부족과 관련 있다. 집권 여당의 김무성 대표는 올해 초 심지어 “자유를 유보해서라도 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이런 것이 바로 5·16혁명이었다”라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한국에서 경제성장은 ‘위대한 탈출’이 아니라 ‘위대한 속박’이 될 판이다.
자유를 유보하는 성장이 아니라 자유를 확대하는 경제성장, 이게 국가 지도자의 꿈이 돼야 하지 않겠는가.
미국 캔자스대 사회학과 교수 chkim.ku@gmail.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2015.11.18.~11.24|1013호 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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