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조달시장에서 대기업 진출이 제한된 ‘중소기업 간 경쟁제품’ 중 하나인 폴리염화알루미늄(PAC)을 생산하는 중소기업 4곳은 올해 초 조달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이 업체들은 “공공기관에 납품하는 일부 업체들이 ‘국내산 원료를 사용해야 한다’는 고시규정을 어기고 값싼 수입 원료를 쓰고 있다”라고 주장했다. 조달청은 실태조사를 통해 원산지를 속인 업체 11곳을 적발했다. 하지만 위반 업체들은 단순 경고조치만 받았다.
조달청 관계자는 8일 동아일보에 “주무부처인 중소기업청에서 ‘고시에는 국내산이라 적혀있지만 수입 원료를 써도 문제가 안 된다’는 유권해석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폴리염화알루미늄은 정수 과정에서 불순물을 걸러주는 정수처리제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운영하는 정수장에 꼭 필요한 물질로 국내 공공조달시장 규모만 217억 원에 이른다. 2007년 중소기업 간 경쟁제품 제도가 시행될 때부터 보호 품목으로 지정됐다.
중기청은 2010년에 고시를 개정해 폴리염화알루미늄 ‘직접 생산’의 뜻을 ‘주원료인 수산화알루미늄과 부재료인 염산을 국내의 제조사로부터 구입하고(후략)’라고 정의했다. 당시 196개 중소기업 간 경쟁제품 중 국산 원료를 써야 한다고 정의해놓은 제품은 폴리염화알루미늄이 유일하다. 고시대로라면 폴리염화알루미늄을 만들 때 국산 수산화알루미늄을 사용해야만 직접 생산 업체로 인정받는다. 따라서 외국산 원료를 쓴 업체들에 대한 직접 생산 자격을 취소해야 한다는 게 민원을 제기한 업체들의 주장이다.
중기청 관계자는 이에 대해 “고시에서 ‘정의’ 부분은 참고만 할 뿐이지 실제로 직접 생산 여부를 가릴 때 적용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민원을 제기한 업체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고시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외국산을 써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하지만 “참고사항일 뿐”이라는 중기청의 설명과 달리 공정거래위원회는 지난달 해당 고시 규정이 수산화알루미늄 시장의 독점을 불러왔다고 지적하며 개선하도록 중기청에 요구했다. 국내에서 수산화알루미늄을 생산할 수 있는 업체는 A사 단 1곳뿐이기 때문이다. 상당수 폴리염화알루미늄 업체들은 지금까지 공공기관에 납품하기 위해 외국산보다 t당 2만∼7만 원을 더 주고 A사에서 수산화알루미늄을 구입해왔다. 이 때문에 A사가 가격 경쟁을 하지 않아도 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게 공정위의 분석이다. 공정위에 따르면 실제 A사의 수산화알루미늄 시장점유율은 2012년 19%에서 2013년 24%, 2014년 30%로 상승했다.
중기청이 ‘국내 원료를 써야 한다’는 고시 규정을 집어넣은 2010년 이전에도 국내 수산화알루미늄 생산업체는 A사뿐이었다. 이에 대해 중기청 측은 “특정 업체에 이득을 주려고 고시를 바꾼 것은 아니다”면서도 “해당 문구가 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중기청은 지난달 30일 중소기업 간 경쟁제품 관련 공청회를 열어 내년도 고시개정안의 폴리염화알루미늄 규정에서 ‘국내 제조사로부터’라는 문구를 빼기로 했다. 그동안 국내산을 고집해왔던 한 업체는 “주무부처도 왜 적용했는지 모르는 규정 때문에 법을 지키려던 업체만 연간 수억 원의 피해를 봤다”면서 “정부의 제도 관리상 허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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