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만 50세가 되는 고등학교 동기동창 몇 명이 열흘 전 모였다. 고교 때 이과였다는 이유로 정보통신기술(ICT)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가 많다. 그중 한 명은 졸업 후 꼭 30년 만에 다시 얼굴을 봤다. 명문 국립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의 글로벌 기업에서 일한 뒤 8년 전에 한국 대기업의 상무로 스카우트된 최우수 인재다.
그는 연말 인사를 앞두고 마음이 편치 않아 보였다. 경기침체와 저성장의 장기화로 거세게 몰아치고 있는 대기업 인력 구조조정 탓인 것 같았다. 다른 한 친구는 이미 5년 전쯤 국내 최대 전자업체의 연구소에서 나와 중견 벤처기업으로 옮겼다. 30대엔 쪼들렸지만 40대에 명문 사립대 교수가 돼 정년이 15년 남은 또 한 명의 친구를 보며 “역시 한국에선 교수가 최고”란 결론으로 대화는 끝났다.
한국 사회의 중장년층이 살아온 방식은 군대의 ‘선착순’과 비슷하다. 남보다 빨리 대학을 졸업하고 먼저 취업해 동기 중 앞장서 승진하는 게 성공의 공식이었다. 남보다 먼저 결혼해 집 장만하고 자식 낳아 일찍 결혼시키면 금상첨화. 요는 뭐든지 남보다 먼저 하는 게 제일이었다는 뜻이다.
선착순에서 이기는 데에 달리기 실력이 결정적일 것 같지만 경험상 속도보다 중요한 게 눈치와 순발력이다. 대입 체력장 오래달리기에서 만점을 못 받았을 정도로 달리기에 젬병이던 나는 연병장에서 훈련할 때마다 분대장, 중대장의 심기를 살펴야 했다. “골대 돌아 선착순 1명!” 호령이 떨어지는 순간 제일 먼저 스타트해야 첫 바퀴에 1등을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바퀴 이상 중장기전에 돌입하면 실력이 드러나고 더이상의 기회는 없었다.
선착순 세대인 중장년층이 라이프스타일을 바꾸는 건 쉽지 않다. 열흘 앞으로 다가온 ‘60세 정년 시대’를 앞두고 퇴직하는 이들의 충격이 더 큰 것도 이 때문이다. 남보다 더 빨리, 열심히 달려 먼저 부장, 임원이 됐다는 이유로 희망하지 않는 희망퇴직, 명예롭지 않은 명예퇴직까지 먼저 하란 건 억울한 일일 수밖에 없다. 20년 이상 전력 질주한 뒤라 다시 달릴 기력도 얼마 안 남았다. 한참 어린 20, 30대까지 퇴직 대상에 낀 마당에 불편한 속내를 대놓고 드러내지도 못한다.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는 이미 정년연장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대기업의 별’이라고 불릴 만큼 혜택이 많지만 언제라도 잘릴 수 있는 ‘임시직원’이라며 임원 승진을 부정적으로 보는 대기업의 40대가 적지 않다. 역시 언제든 옷을 벗어야 하는 1급 자리에 늦게 도달하기 위해 승진 속도를 늦추겠다는 공무원도 많이 봤다. 인사혁신처가 최근 공개한 올해 7급 국가공무원 민간경력자 채용시험 합격자 중에는 20, 30대 대기업 연구원, 회계사, 약사 등 전문직 종사자가 다수 포함됐다. 이들 세대에게 인생은 더이상 선착순이 아니다.
지난달 전국경제인연합회가 벌인 설문조사 결과 우리 국민이 생각하는 한국 경제의 나이는 50.8세. 한국인의 평균 연령 40.3세보다 10세나 많다. 그만큼 경제가 조로(早老)했다는 뜻이다. 선진국의 선례를 봐도 한번 나이 먹은 국가 경제의 흐름이 벤저민 버튼의 시계처럼 거꾸로 가는 일은 거의 없다. 노동개혁 등 구조적 개혁을 통해 노화를 늦출 순 있지만 1970, 80년대 같은 경제의 청춘기를 되찾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저성장 시대의 도래와 함께 선착순의 시대는 끝났다. 남보다 먼저 골대 한 바퀴 돈다고 끝나는 게임이 아니다. 길어진 정년이나 퇴직 후 인생을 충실히 살기 위해 다시 뛸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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