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철 전문기자의 기업가 열전]<15>박상일 파크시스템스 대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월 6일 03시 00분


교수직 뿌리치고 창업… 원자현미경 세계 첫 상용화

박상일 파크시스템스 사장이 살아있는 세포를 볼 수 있는 원자현미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박상일 파크시스템스 사장이 살아있는 세포를 볼 수 있는 원자현미경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박경모 기자 momo@donga.com
김상철 전문기자
김상철 전문기자
“와, 원자가 보인다.”

1985년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실. 응용물리학 박사 과정을 밟던 그는 원자 모습이 현미경에 연결된 컴퓨터 화면에 나타나자 환호성을 질렀다. 원자는 너무 작아 어떤 도구를 써도 볼 수 없다던 과학계의 통설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원자현미경 개발 이론을 정립한 캘빈 퀘이트 교수의 지도를 받아 시제품 개발에 나선 지 3년 만에 신의 영역으로 여기던 초미세 세계를 볼 수 있는 길을 연 것이다.

“서울대 교수 자리를 왜 포기해?”

서울대 물리학과를 마친 뒤 유학을 떠나 1987년 스탠퍼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그가 모교의 교수직 제의를 거절하고 사업을 하겠다고 하자 가족과 주위 사람들이 말렸다.

“나만 할 수 있는 일에 도전해야죠.”

제록스, NTT 등 기업 관계자들이 대학 연구실로 찾아와 원자현미경 시제품을 본 뒤 정식 제품으로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수요가 있는 것을 확인한 그는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30세 때인 1988년 스탠퍼드대 인근 실리콘밸리에 얻은 셋집의 차고에서 박사 동기 1명과 원자현미경 제작에 나섰다. 그리고 현미경 탐침과 시료의 원자가 서로 끌어당기고 밀어내는 힘을 레이저로 측정해 이미지화하는 새 원자현미경(AFM)을 세계 최초로 상용화했다. 회사 이름은 자신의 성(姓)을 따 PSI(Park Scientific Instrument)로 정했다. 주인공은 박상일 파크시스템스 대표이사 사장(58)이다.

원자현미경은 광학현미경, 전자현미경에 이은 3세대 현미경으로 배율이 수천만 배나 돼 전자현미경으로 볼 수 없는 nm(나노미터·1nm는 10억분의 1m) 크기의 물체를 관찰할 수 있다. 진공 상태에서 고체 시료만 볼 수 있는 전자현미경과 달리 대기 중에서 혈액 같은 액체 시료의 형상은 물론이고 물리적 전기적 성질까지 알 수 있어 나노 및 바이오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계측장비다.

박 사장은 판로 개척에 나서 하버드대, 독일 막스플랑크연구소 등에 연구용 원자현미경을 공급했다. 1989년 48만 달러에 불과하던 매출은 3년 후 595만 달러로 늘었다. 한때 사업 확대에 따른 운영자금 부족과 경쟁회사의 등장으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더 큰 문제는 고국에 대한 그리움. 그는 1997년 연매출 1200만 달러의 PSI를 미국 계측장비업체 서모피셔에 1700만 달러에 매각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잠재 시장이 큰 산업용 원자현미경을 만들자.”

한국에 돌아오자 KAIST 포스텍 등 국내 유수의 대학에서 교수직을 제의했다. 고민 끝에 초심을 살려 다시 창업하기로 결심했다.

귀국 몇 달 뒤 서울 서초구에서 사무실을 빌려 PSIA를 설립했다. 초기엔 서모피셔에 매각한 PSI의 연구용 원자현미경을 수입해 대학과 기업 등에 판매했다. 수익이 생겼지만 만족하지 않고 반도체 생산 공정에 쓰이는 원자현미경 개발에 나섰다. 1998년 첫 제품으로 200mm 웨이퍼의 결함 여부를 파악할 수 있는 원자현미경 ‘SM5-200’을 만들었다.

2000년 삼성전자가 600×720mm 액정표시장치(LCD) 제조용 원자현미경을 주문했다. 그렇게 큰 시료를 검사하는 원자현미경은 세상에 없었다. 원자현미경 틀을 크게 만들면 진동 탓에 성능 유지가 안 되기 때문이다. 1년 만에 문제를 해결하고 자동화 기능까지 갖춘 LCD용 원자현미경을 개발했다.

성장 가도를 달리던 2001년 돌발 변수가 생겼다. PSI 매각 당시의 계약에 따라 기술을 제공하던 서모피셔가 세계적 제조장비 업체인 비코에 넘어간 것. 비코는 기술 개발을 중단하지 않으면 연구용 원자현미경은 물론이고 주요 부품도 줄 수 없다고 했다.

“홀로 서자.”

그는 이를 기회 삼아 기술 독립하기로 결심했다. 6개월간 하루도 쉬지 않고 개발에 매진해 ‘XE-100’을 내놓았다. 콜럼버스의 달걀에 비유되는 분리형 스캐너를 세계 최초로 적용한 이 원자현미경은 탐침과 시료가 접촉하지 않아 해상도가 높은 게 특징이다.

여세를 몰아 시료가 70도로 기울어진 입체 모양까지 측정할 수 있는 3D 원자현미경도 개발했다. 이를 본 IMEC가 기술 제휴를 요청했다. IMEC는 세계 최고 장비로 차세대 반도체 기술을 개발하는 컨소시엄. 인텔 삼성전자 등이 회원사다.

박 사장은 파크시스템스를 세계 최초 기록을 여러 개 보유한 원자현미경 선도기업으로 키웠다. 동아일보 ‘10년 후 한국을 빛낼 100인’에도 선정된 그는 파크시스템스를 글로벌 넘버원 브랜드로 키우기 위해 오늘도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김상철 전문기자 sckim007@donga.com
#파크시스템스#박상일#원자현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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