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할 때 리스크라는 단어를 들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생각은 무엇인가? 몇 달간 자신의 주식 포트폴리오가 25% 이상 급락했다면 주식을 어떻게 해야 할까….’
컴퓨터 모니터에 질문 다섯 개가 차례로 떴다. 질문에 답했더니 ‘투자 시 위험선호도 9점 만점에 3점’이라는 투자 성향 점수가 표시됐다. 증권사 객장에서 측정했던 투자성향과 비슷한 결과다. 컴퓨터가 제시한 여러 투자안 중 ‘최대 수익률 15%, 기대 수익률 6%, 최대 손실률 ―9%’를 선택했다. 투자기간은 2년, 초기 투자금액은 500만 원, 매달 추가할 투자금액은 50만 원으로 정했다.
마우스 클릭이 끝나자 컴퓨터가 맞춤형 투자 포트폴리오를 제안했다. 해외 상장지수펀드(ETF)의 기초자산별로 주식 22.7%, 채권 54.8%, 통화 9.9%, 상품 7.9%, 부동산 4.6%에 나눠 투자하라는 것이었다. 12개로 이뤄진 종목별 ETF 투자 비중도 보여줬다.
이는 동아일보 기자가 8일 온라인으로 가상 체험해본 쿼터백투자자문의 ‘로보어드바이저’ 자산배분 시뮬레이션 결과다. 로보어드바이저는 금융공학적 알고리즘을 이용해 고객의 성향을 분석한 뒤 자산관리 방안을 제안하고 운용도 해주는 서비스. 사람과 같이 동작하는 로봇은 아니지만 인공지능(AI) 컴퓨터가 은행이나 증권사의 프라이빗뱅커(PB)처럼 투자 조언을 해준다고 해서 ‘로봇 PB’로 불린다. 로봇이 사람을 대신해 투자 조언까지 하는 시대가 열린 것이다.
로봇PB뿐이 아니다. 대출 심사를 하거나 사람처럼 움직이고 대화를 하며 은행 업무를 도와주는 로봇도 등장했다. 금융과 정보기술(IT)이 융합된 핀테크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인공지능(AI)을 활용한 금융서비스가 금융의 판을 바꿀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하지만 잠재리스크 등 해결할 과제도 적지 않다.
로봇이 자산관리를 해주는 시대
2008년 미국에서 시작된 로보어드바이저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로보어드바이저가 운용하는 자산(운용 규모 상위 11개사)은 2014년 말 190억 달러로 최근 8개월간 65.2% 증가했다. 2020년에는 로보어드바이저 운용 자산이 20배 이상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될 정도다.
로보어드바이저의 급성장은 일반 자문서비스에 비해 수수료가 저렴하고 소액 투자자도 이용할 수 있어 자산관리에 관심이 많아진 중산층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설문을 통해 투자 성향을 파악해 맞춤형 투자 포트폴리오를 짜주고, 시장 환경에 따라 자산 비중을 실시간으로 재조정해주는 서비스가 먹힌 것이다. 세금을 줄이기 위한 전략을 함께 제공하는 서비스도 있다. 전균 삼성증권 수석연구위원은 “저성장이 지속되면서 IT에 친숙한 밀레니얼 세대(1980∼2000년대 초반 출생)가 투자에 관심을 갖는 등 자산관리 수요가 확대되고 있다”고 말했다.
로보어드바이저 시장의 급성장에 위기감을 느낀 글로벌 투자은행(IB)도 이 시장에 잇달아 뛰어들고 있다. 찰스슈워브, 뱅가드가 진출한데 이어 지난해 8월 글로벌 자산운용사인 블랙록도 로보어드바이저 회사인 퓨처어드바이저를 인수했다.
국내에서도 로보어드바이저가 막 걸음마를 뗐다. 쿼터백, NH투자증권 등이 로보어드바이저 서비스를 선보였고, 상당수의 증권사와 자산운용사가 이 시장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다. 최창규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현재 전문기업과 증권사들이 관련 서비스를 개발하고 있어 올해가 국내 로보어드바이저의 원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간 같은 ‘금융로봇’도 등장
로봇은 자산관리 이외에 다양한 금융서비스 부문에서 활약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대출심사를 대신해주는 로봇을 개발 중이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일본의 로봇 벤처기업 헤로즈가 은행 대출용 인공지능 시스템을 갖춘 로봇을 개발하고 있다. 이 로봇은 대출 신청자의 거래명세 등 각종 데이터를 이용해 상환 가능성을 판단하고 대출 승인 여부를 결정하는 일을 맡는다.
미국 호주 싱가포르 등지에선 글로벌 IT 기업 IBM의 인공지능 시스템인 ‘왓슨’을 이용해 이미 다양한 금융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12년 미국 씨티은행은 고객의 거래명세 등 각종 데이터를 종합해 대출 여부를 판단하는 작업을 왓슨에게 맡겼다. 호주 ANZ은행은 자산관리사업부문에 왓슨을 접목해 고객의 금융자산 현황 등 다양한 데이터를 활용한 자문서비스를 선보였다.
아예 인간처럼 걷고 말하는 휴머노이드 로봇은 은행 점포의 풍경까지 바꾸고 있다. 저팬타임스 등에 따르면 일본 미쓰비시 UFJ 은행은 지난해 4월 로봇 나오(Nao)를 일부 지점에 배치했다. 키 58cm, 무게 5.4kg의 소형 로봇인 나오는 이마에 부착된 카메라로 상대방의 표정과 목소리를 포착하고 분석한다. 19개 언어로 은행을 찾은 고객과 간단한 상황별 대화도 할 수 있다. 이휘정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수석연구원은 “미국 스털링뱅크앤드트러스트도 고객 응대용 로봇을 도입했고, 영국 바클레이스 은행은 자금이체 업무에 로봇 기술을 활용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로봇의 역할이 확대되면서 전통 금융업의 위기감은 고조되고 있다. 황영기 금융투자협회장은 “파이낸스 온라인 시대가 본격화하면 금융권에서 부가가치를 만들지 못하는 지점과 인력 등 비용 구조에 대해 고민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로봇이 금융의 판을 바꿀 것”
전문가들은 로봇을 이용한 금융서비스가 빠르게 확산될 것으로 예상한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 인터넷·모바일 등의 통신 네트워크 기술이 급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유신 핀테크지원센터장(서강대 경영학부 교수)은 “기술의 발달로 과거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방대한 데이터 축적이 가능해졌고 이를 활용해 다양한 니즈(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맞춤형 서비스가 가능해졌다”고 말했다. 박진우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연구원은 “2025년쯤에는 많은 금융업 직종이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것”이라고 전망할 정도다. 데이터에 의한 컴퓨터의 의사결정이 인간보다 더 합리적인 예측과 의사판단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도 크다. 아사하라 다이스케 헤로즈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사람보다 컴퓨터가 더 정확하게 판단할 때가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로봇 금융서비스가 전통 금융업을 대체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도 많다. 우선 로보어드바이저는 진짜 PB처럼 노후설계, 부동산 등 상황별로 복합적인 재무설계를 하는 데 한계가 있다. 금융시장의 모든 변수를 반영할 수 없고 금융위기 이후 등장한 로보어드바이저 기술이 폭락장에 대처한 경험이 없다는 점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우희성 국제금융센터 연구원은 “최근 유럽 감독당국은 금융서비스의 자동화에 다양한 잠재 리스크가 있다고 판단해 감독과 규제를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데이터보다 인간의 직관이 더 필요하다고 믿는 투자자들의 신뢰를 어떻게 얻을 것인지도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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