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유가는 산유국에는 재앙이지만 원유 수입국엔 축복이었다. 그러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저성장이 일상화한 ‘뉴 노멀(New Normal)’ 시대엔 저유가의 축가(祝歌)가 들리지 않는다. 산유국뿐만 아니라 원유 수입국도 ‘역(逆)오일 쇼크’로 휘청거리고 있다.
경제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유가가 10% 떨어지면 경제성장률이 0.1∼0.5% 상승한다는 원칙이 있다. 그런데 지난 18개월간 유가가 110달러에서 30달러 미만으로 75%나 떨어졌는데도 (저유가의) 경제적 혜택이 보이지 않는다”고 진단했다. 미국 씨티그룹도 최근 보고서에서 “저유가의 이점을 누려 보기도 전에 오히려 피해만 커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문제는 저유가가 상당 기간 이어지는 ‘저유가 현상의 장기화’라는 데 있다. 미국의 대표 투자은행인 JP모건은 1분기(1∼3월) 평균 유가가 28달러로, 2분기(4∼6월)엔 25달러로 떨어질 것이라고 예측했다.
○ 산유국들, 경제위기 넘어 정권까지 위협받아
산유국들은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에 빠져들고 있다. 중남미 최대 산유국인 베네수엘라는 1월 국가부도 위험을 나타내는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이 2015년 11월의 약 2배로 급등했다. 미국 신용평가회사인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는 올해 신용등급이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 25개국을 선정했는데 아프리카 앙골라, 남미 베네수엘라, 중동 사우디아라비아 등 각 지역을 대표하는 산유국이 모두 포함됐다. 영국 프랑스 핀란드 등 유럽 선진국들도 이 리스트에 올랐다.
말레이시아와 브라질은 국영 석유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김원호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대학원 교수는 “원유 의존적 경제 구조를 유지해온 신흥국들은 저유가 시대에 생존하려면 구조조정을 할 수밖에 없다”며 “복지 혜택도 축소될 가능성이 커 국민적 반발과 정치 및 사회적 혼란을 불러올 것”이라고 말했다.
저유가 장기화는 석유 의존도가 높은 일부 국가들의 정치 지형까지도 바꾸는 ‘게임 체인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중동지역 최대 산유국인 사우디 정부는 ‘오일달러’를 바탕으로 과감한 복지 정책을 펴 왕실의 무능과 독재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워왔다. 그러나 지난해와 올해 재정적자 규모가 980억 달러(약 117조9000억 원)와 870억 달러(약 107조500억 원)로 예상돼 무상의료를 비롯한 복지예산을 확 줄여야 한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중동정치)는 “복지정책이 본격 축소되면 왕실에 대한 불만이 폭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 역오일 쇼크에 증폭되는 디플레이션 공포
저유가 장기화 전망은 선진국의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 공포에 기름을 부었다. 미국에서 저유가 혜택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은 주유소와 자동차 판매점에 불과하다. 값싼 휘발유는 지난해 미국 자동차 판매량을 사상 최대인 1747만 대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다른 곳에선 냉기가 뚜렷하다. 뱅크오브아메리카(BOA)메릴린치의 이선 해리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유가가 떨어지면 가계의 가처분소득이 높아지고 소비가 늘어 국내총생산(GDP)도 증가해야 한다”며 “하지만 지금은 이런 긍정적 요인보다는 에너지 업종의 감원과 투자 감소 등 부정적 영향만 부각되고 있다”고 진단했다. 미국 최대 일자리 검색회사인 ‘인디드’는 “지난해 12월까지 13개월간 저유가 탓에 미국 내에서 일자리를 잃은 에너지 업종 종사자가 1만6400명이나 된다”고 추산했다.
새해 들어 글로벌 경기 침체에 대한 우려가 커지면서 주가와 유가가 나란히 급락하는 현상도 두드러졌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5일 뉴욕증시 S&P500지수와 북해산 브렌트유 상관계수가 올 들어 20일 거래 기간에 0.97로 1990년 이후 최고 수준을 보였다고 보도했다. 상관계수가 ‘1’이면 유가와 증시가 같은 방향으로, ‘―1’이면 다른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저유가 현상이 앞으로 경기가 나빠질 것이란 시장의 불안감을 부추기면서 주가를 끌어내리고 있는 것이다. 미국 일본 등 선진국들은 갖가지 부양책을 서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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