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의 농협 비리 수사가 한창이던 몇 달 전 어느 금융계 인사를 만났다. 농협 사정을 잘 아는 그는 관심의 초점이던 최원병 농협중앙회장의 사법처리에 회의적이었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인 업무상 배임죄를 적용하면 몰라도 최 회장의 수뢰 가능성은 극히 낮습니다. 전직 직선 회장들의 몰락을 보면서 돈 문제는 극도로 조심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실제로 검찰은 넉 달간의 수사를 통해 전현직 농협 간부 25명을 사법처리했지만 최 회장의 혐의는 밝혀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의 이름이 언론에 오르내리면서 적잖은 상처를 입었다. 직선 4명 중 3명 구속
올해 창립 55년을 맞는 농협은 최 회장을 포함해 모두 15명의 회장이 거쳐 갔다. 특히 민주화 바람을 타고 1988년 임명제 대신 직선제가 도입되면서 민선 회장 시대가 열렸다.
선거를 통해 당선된 중앙회장들은 대부분 추락했다. 직선 후 초대 한호선 회장, 2대 원철희 회장은 공금을 빼돌려 비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1994년과 1999년 구속됐다. 1999∼2007년 재임한 정대근 회장은 세종증권 인수와 휴켐스 매각 대가로 50억 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 등으로 2007년 법정 구속됐다. 4명의 직선 회장 중 최 회장을 제외한 3명이 모두 비리로 사법처리된 것은 다른 조직에서는 찾기 어려운 부끄러운 기록이다. ‘기관장 오욕(汚辱)’의 역사로는 손영래 이주성 전군표 전 국세청장이 잇달아 구속된 국세청과 막상막하다.
‘농협 파워’는 막강하다. 229만 농민 조합원을 대표하는 농협의 총자산은 432조 원에 이른다. 단위조합은 1134개, 계열사는 31개다. 특히 전국 곳곳에 실핏줄처럼 퍼진 조합 덕분에 정치적 영향력도 크다. 여야 할 것 없이 농협중앙회나 지역 조합에 찍히면 선거가 어려워 농협과 유착된 ‘농협족(族) 의원’이 즐비하다. 1994년 농협개혁론이 처음 불거진 뒤 여러 차례 개혁 법안이 마련됐지만 번번이 무산됐다가 2009년에야 겨우 국회를 통과한 것도 농협의 전방위 로비에 넘어간 정치인들의 소극적 태도 때문이었다.
더 코미디 같은 일도 있었다. 한호선과 원철희는 비리 혐의로 체포되고도 1996년과 2000년 자민련 의원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수뢰한 돈의 일부를 노무현 정권의 몇몇 실세들에게 ‘상납’한 정대근 역시 국회 진출에 강한 집념을 보였다. 중앙회장들부터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1, 2, 3차산업을 합친 ‘6차산업’으로 불리는 농업의 경쟁력 향상은 뒷전에 밀릴 수밖에 없었다. ‘선거잡음’ 김병원號 순항할까
이달 12일 치러진 차기 농협중앙회장 선거에서 김병원 농협양곡 대표가 세 번째 도전 끝에 당선됐다. 그러나 1차 투표에서 3위에 그친 최모 후보가 결선투표에서 김 당선인을 지지하는 과정에서 불법 혐의가 불거지면서 새로운 변수가 생겼다. 중앙선관위가 검찰에 정식으로 수사를 의뢰한 사안인 만큼 두 사람 사이에 부적절한 거래가 있었다면 후폭풍이 만만찮을 것이다.
2009년 개정된 농협법은 ‘제왕적 직선 회장’의 폐단을 줄이기 위해 선거 방식을 농협조합장 전체가 참여하는 직선제에서 선출된 대의원들이 투표하는 간선제로 바꾸고 회장 연임을 금지했다. 2012년에는 오랜 숙제였던 농협의 신용 부문과 경제 부문이 분리됐다. 하지만 이런 외형적 변화에도 불구하고 ‘김병원호(號)’가 공식 출범도 하기 전에 터져 나온 선거 잡음은 진정한 농협 개혁이 여전히 멀었음을 보여준다. 민선 농협중앙회장 잔혹사는 도대체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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