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낮고 단호했다. 기자들은 취재원의 목소리를 듣고 취재 가능성을 판별한다. 1월 18일 밤 삼성그룹 임원에게서 들은 목소리에는 ‘어떤 것도 알려줄 수 없다’는 단호함이 담겨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취재였다. 그날 삼성그룹은 올해 상무로 승진한 신임 임원 197명의 축하 만찬을 열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참석한 부부동반 만찬에서 어떤 술로 건배를 했는지 알아내는 것이 임무였다. 배포한 자료에 건배주 내용으로 적힌 ‘한국 전통주(복분자주)’의 생산업체 등을 묻자 단호한 어조의 ‘취재 불가’ 통보가 나온 것이다.
출입기자가 아니어서 퉁명스러운가 하고 삼성의 다른 계열사 임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역시 우물쭈물하긴 마찬가지였다. “내가 그 자리에 들어가지도 않고, 술 이름까지는 파악하지 않아요.” 함구령이 떨어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삼성 임원 만찬 건배주 이름 알아내기가 남북 정상회담 만찬주 취재만큼 어려워진다.
기사 마감을 끝내고 역으로 삼성이 ‘건배주 함구령’을 내린 까닭을 취재했다. 결론은 매년 건배주 때문에 적지 않은 고충에 시달렸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삼성그룹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한국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오너 일가가 함께한 자리에서 마신 술은 호사가들의 화젯거리가 됐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평소 와인을 즐겼다. 이 회장이 마신 와인은 매번 요란하게 보도됐다. 2007년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단 만찬에서 개봉한 ‘샤토 라투르’부터 자신의 칠순 잔치 때 내빈에게 내놓은 ‘피터 마이클 벨 코트 샤르도네’까지. 이른바 ‘이건희 와인’이란 이름으로 마케팅하는 와인만 10종류가 넘는다. 와인 수입업체들은 삼성이 건배주를 발표할 때마다 수입해 팔기 바빴다.
삼성그룹은 건배주가 와인업체의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을 막기 위해 2014년 초부터 와인, 샴페인 대신 한국 전통주로 ‘주종’을 바꿨다. 그해에는 청주, 2015년엔 복분자주를 사용했다. 하지만 말썽이 생기긴 마찬가지였다. 한 전통주로 건배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오면 경쟁업체 여러 곳이 “왜 삼성그룹이 특정 업체를 챙기느냐”고 항의하는 일이 생겼다. ‘회장님 술’로 알려지면 삼성그룹 계열사 임직원들의 소비까지 늘기 때문에 주류업체로서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2년 동안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올해는 아예 업체 이름을 ‘지우는’ 전략을 쓴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도 같은 방식을 쓸 수 있을지에 대해선 물음표가 붙는다. 삼성그룹의 행보 하나하나가 온 국민의 관심사항이 된 지 오래다. 차라리 이런 관심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하면 어떨까. 장애인 단체, 복지원 등이 만든 술을 만찬주로 활용해 삼성이 전국적으로 홍보해 주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올해 삼성이 건배에 쓴 복분자주는 지방에서 생산된 1만 원대 제품으로 확인됐다. 삼성과 복분자주 업계를 위해 그 이름은 밝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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