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전을 던져 앞면이 나오면 1억 원을 받지만 뒷면이 나오면 한 푼도 못 받는 ‘옵션 A’와 동전 던지기 결과에 상관없이 무조건 3000만 원을 받는 ‘옵션 B’가 있다. 수학적으로 계산한 기댓값은 A가 5000만 원으로 B(3000만 원)보다 높다. 하지만 선택을 하라면 적지 않은 이들이 B를 찾는다. ‘1억 원’에 대한 기대감보다 ‘3000만 원도 못 벌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이 더 크기 때문이다.
# 당장은 연봉이 적지만 앞으로 보수가 안정적으로 오를 것으로 믿는 A 씨, 또 지금은 억대 연봉자이지만 언제든 회사에서 잘릴 위험이 있다고 생각하는 B 씨가 있다. 당신이 자동차 영업사원이라면 누구에게 새 차를 팔겠는가. 다른 조건이 같다면 자기 미래를 비관하는 B 씨보다 비록 돈은 적게 벌지만 앞날을 낙관하는 A 씨가 차를 살 확률이 더 클 것이다.
불투명한 미래는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 좀 손해를 보더라도 보다 안전한 수를 택한다. 미래를 모르는 것 자체도 스트레스인데, 하물며 그 전망마저 어둡다면 더 큰 문제다. 우리 경제는 지금 이런 ‘비관(悲觀)의 덫’에 갇혀 있다. 현금이 있지만 불안한 장래 전망에 소비자는 지갑을 닫고 기업은 투자와 고용을 줄인다. 모험적인 투자보다는 수익률은 낮지만 안전한 곳에 돈을 묻는 게 요즘 투자 트렌드다. 앞날에 대한 걱정이 지금의 경기를 더 억누르는 양상이다.
여기에 정책 당국자들의 고민이 있는 것 같다. 얼마 전 고위 공직자 C 씨와 나눈 대화다. 그에게 “소비가 늘지 않는 이유가 뭐냐. 다들 미래를 불안하게 보기 때문이냐”고 묻자 그는 한숨을 내쉰 뒤 이렇게 푸념했다.
“해외에 가면 ‘도대체 한국이 왜 걱정이냐’는 말을 듣는다. 3% 성장률에 경상수지는 최대 흑자이고 재정 여건도 괜찮다. 한마디로 ‘우리 경제 어렵다’고 얘기하기 힘든 상황이다. 그런데 막상 안에서는 온통 위기론, 비관론뿐이니 (정책을 펴는 입장에서) 무척 힘이 든다.”
실제로 국내 경제의 체감경기 상황을 보여주는 한국은행의 소비자심리지수는 한겨울이다. 앞으로의 경기에 대한 소비자들의 예상을 묻는 것인데, 생활형편전망 가계수입전망 향후경기전망 취업기회전망 등 ‘전망’이란 이름이 붙은 지표는 지난 두 달 사이 모조리 하락했다. 이런 수치를 아우르는 종합지수도 작년 6월 메르스 사태 이후 최저 수준이다. 오랫동안 이어진 불황이 소비자들의 머릿속에 상수(常數)로 박혀 있는 것인지, 아니면 ‘흙수저’ 논란과 같은 작금의 세태가 미래 희망마저 앗아가고 있는 것인지, 정확한 원인은 알 수가 없다. 어쩌면 그 모든 게 다 이유인지 모른다.
역대 정부는 경제주체들의 심리가 나빠지면 그 흐름을 반전시키려고 사력을 다했다. 비관론이라는 게 무섭게도 ‘자기실현적(self-fulfilling)’인 면이 있기 때문이다. 디플레이션이 대표적 사례다. 경기와 물가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퍼지면 소득이 줄어들 것이라 판단한 가계가 소비를 줄이고 이는 기업의 생산 감소, 고용 둔화, 가계 소득의 감소 등으로 순식간에 이어진다. 투자 시장도 마찬가지다. 정부가 다양한 세제혜택을 주고 대출 규제를 풀어도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팽배하면 누구도 집을 사려 하지 않는다. 정부가 “장밋빛”이라 욕을 먹으면서도 자꾸 낙관적인 경제 전망을 내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80여 년 전 미국 대통령(프랭클린 루스벨트)의 말처럼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관료들은 사석(私席)에서 “우리 국민은 경제를 비관하는 경향이 다른 나라보다 크다”고 불평을 터뜨리곤 한다. 또 실적이 좋든 나쁘든 항상 우는 소리를 하는 기업인, 통상 부정적인 지표를 유난히 강조해 보도하는 언론도 종종 공범(共犯)으로 엮인다. 하지만 그것이 누구의 책임이든 간에, 우리 국민의 경제에 대한 자신감이 과거보다 크게 떨어졌고, 이는 경제 재도약의 심각한 걸림돌이란 점은 분명한 사실이다. 경제난에 지친 국민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활력을 북돋울 수 있는 리더십이 어느 때보다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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