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외환위기는 많은 한국인에게 아픈 기억을 남겼다. 흔히 ‘IMF(국제통화기금) 사태’로 불린 경제위기의 주범은 기업의 과잉 부채와 금융권 부실이었다. 임기 후반 무능과 리더십 부재가 두드러졌던 김영삼 대통령 등 집권세력, 대선을 의식한 정략적 계산으로 구조개혁의 발목을 잡은 김대중 김종필의 야당, 나라가 파국으로 치닫는데도 파업으로 날을 세운 강성 노동계의 책임도 컸다. 외환위기 前夜의 실책들
언론도 남 탓만 할 처지는 못 된다. 외환위기 전야(前夜) 한국 언론은 적어도 세 가지 큰 실책을 범했다.
경상수지 적자가 급증한 1990년대 중반은 지나치게 고평가된 원화가치 약세가 절실한 때였다. 하지만 환율이 올라 원화가치가 하락하자 언론은 “정부는 뭐하나”며 목소리를 높여 가뜩이나 빠듯한 외환보유액을 환율 방어에 소진케 했다. 노동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라고 연일 국회에 촉구하다가 1996년 12월 여당의 강행처리 후 노동계 파업이 확산되자 뒷짐을 졌다. 경영진과 노조가 한통속이었던 부실기업 기아자동차의 부도처리가 늦어진 것도 정치권과 언론의 여론몰이와 무관하지 않다.
최근 국내외 경제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면서 외환위기의 악몽을 떠올리는 국민이 늘어났다. 글로벌 경제상황은 그때보다도 나쁘다. ‘수출 한국’을 대표하는 5대 주력업종 간판기업인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현대중공업 LG화학이 모두 위기감에 휩싸였다. 중견·중소기업과 자영업자들의 사정은 더 열악하다. 뼈아픈 경험을 통한 학습효과로 기업과 금융계, 정부가 ‘제2의 IMF 사태’까지 치닫진 않도록 대처하리라 믿고 싶지만 안심하긴 이르다. 20년 전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아야 하는 것은 언론도 마찬가지다.
실물 분야 침체가 만성 질환이라면 주식 채권 외환 등 금융시장은 대외 변수가 출렁이면 단기간에 급성 질환으로 번질 위험성이 높다. 현재 한국의 외환보유액은 3673억 달러다. 1996년 말 332억 달러의 10배를 넘지만 갑작스러운 충격이 닥치면 한순간에 격감할 수 있다. 위기에 대비해 외화 실탄은 최대한 아껴야 한다. 급격한 환율 변동에 당국이 팔짱만 끼고 있을 순 없지만 원화가치 방어에 외환보유액을 대거 투입하고 언론이 이를 부추기는 전철(前轍)을 밟아선 결코 안 된다.
대내외 변수가 변하지 않는 한 판단의 일관성도 중요하다. 적자국채를 발행해서라도 경기를 살려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견해가 다를 수 있다. 하지만 어제는 재정건전성이 흔들린다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오늘은 재정적자를 늘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하라고 촉구한다면 무책임하다.
미국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어느 날 참모들에게 팔이 하나밖에 없는 ‘외팔이 경제학자’를 찾아오라고 푸념했다. 경제학자들에게 조언을 구하면 정책의 양면을 함께 설명하는 데 지쳐서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정책은 빛과 그늘이 동시에 있다. 결국 타이밍을 감안한 선택의 문제다. 학계에서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다른 면은 외면하는 외팔이 경제학과 포퓰리즘의 유혹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저널리즘의 세계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외팔이 경제학자’는 없다
경제는 깨지기 쉬운 유리와 같다. 나는 경제를 다루는 정부 당국자와 정치인, 언론인은 국가의 미래에 대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깊이 고민하고 판단해야 한다고 믿는다. 국내외 경제를 둘러싼 불확실성이 어느 때보다 높아진 지금 언론에 몸담고 있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쓰는 글들은 모두 자신의 이름과 함께 역사의 기록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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