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담당자의 말을 듣자 묵은 체증이 싹 가신 듯했다. 대학 교수인 그는 3년짜리 정부 연구과제를 맡아 1년간 주관했다. 생체물질의 미세한 변화를 분석할 수 있는 초소형 기기인 바이오 멤스를 개발하는 과제였다. 그런데 2년 차부터 사업화할 중소기업이 과제를 주관해야 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다. 과제가 좋고 연구비도 많기에 계속 맡고 싶었다. 그래서 정부에 질의했는데 본인이 벤처기업을 설립해 계속해서 과제를 주관해도 된다는 답변을 들은 것이다.
같은 연구실을 쓰던 동료 교수에게 이 말을 전하자 창업에 동의했다. 전공을 살려 잘할 수 있고 성장 가능성이 있는 사업 아이템을 찾아 나섰다.
고려대 화학과를 나와 미국 미시간대에서 바이오센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국내 기업에 관련 기술을 이전하고 자문활동 경험도 있어 자신이 있었다.
당시 로슈, 존슨앤드존슨, 바이엘, 애보트 등 글로벌 ‘빅4’가 세계 혈당측정기 시장의 98%를 장악하고 있었다. 철옹성처럼 높은 벽을 보지 않고 시장 규모가 7조 원에 이르는 매력에 더 주목했다. 세계 시장의 0.1%만 차지해도 매출이 70억 원이니 취업난을 겪는 제자들에게 일자리까지 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소박한 꿈을 갖고 2000년 대학 화학과 센서연구실에서 벤처기업을 창업한 주인공은 차근식 아이센스 대표이사 사장(62·광운대 화학과 교수)이다. 남학현 교수(57·아이센스 사장)와 연구실에서 일하던 석·박사 과정 제자 6명도 참여했다.
국내 기업을 돌며 사업계획을 설명해 2곳에서 6억 원의 투자를 유치했다. 운영비를 확보했으나 총력을 기울이자는 뜻에서 개발까지의 데드라인을 제시했다.
혈당측정기는 당뇨병 환자가 혈액 내 혈당을 측정하는 데 쓰는 진단기기다. 피부를 찔러 피가 나오게 하는 바늘 같은 랜싯, 혈액을 묻히는 종이 막대 모양의 스트립, 혈당 농도를 재는 명함 크기 장치인 측정기로 구성된다.
기존 제품으로 혈당을 측정하려면 혈액 4μL가 필요했다. 측정 시간도 30초가 걸렸다. 혈액의 양과 측정시간을 줄인 제품을 만들기로 했다. 2년간 많은 시행착오 끝에 피 한 방울 정도인 0.5μL로 5초 만에 혈당을 재는 획기적인 시제품을 개발했다. 핵심 기술인 바이오센서가 들어가는 스트립은 자체 제조하고, 하드웨어인 측정기는 외주를 줬다.
2003년 말 자가 혈당측정기 ‘케어센스(CareSens)’를 출시하고 시장 개척에 나섰다. 경쟁력을 갖춘 만큼 기대가 컸으나 이름 없는 벤처기업 제품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냉담했다.
제약회사와 병원 등에서 거푸 퇴짜를 맞을 때 행운의 여신이 찾아왔다. 대리점에 혈당측정기 판매를 맡겼던 글로벌 기업들이 이익을 더 내려고 직영체제로 전환하자 분개한 대리점들이 케어센스를 팔겠다고 나선 것이다.
미국 혈당측정기 제조업체인 아가매트릭스 관계자가 찾아왔다. KOTRA 추천을 받았다며 자사(自社) 전용 스트립을 공급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기존 특허에 걸리지 않는 신기술에 대한 설명을 듣고 스트립을 살펴보더니 1억 개를 주문했다. 세계 5위 혈당측정기 판매 업체인 일본 아크레이도 글로벌 제약회사 사노피에 납품할 스트립을 주문했다. 2010년에는 뉴질랜드 정부의 입찰에 참여해 글로벌 기업 ‘빅4’를 물리치고 스트립 독점 공급권을 따냈다.
초창기에는 대학 앞 임대 공장에서 하루 3만 개의 스트립을 생산했다. 주문량이 늘어나자 2007년 강원 원주, 2012년 인천 송도, 지난해 중국 장쑤 성 장자강 시에 공장을 지어 연산 20억 개 이상으로 생산능력을 늘렸다.
아이센스는 코딩이 필요 없는 혈당측정기, 무선통신이 가능한 혈당측정기, 현장검사용 혈액분석기 등 바이오센서 특허 146개(해외 83개, 국내 63개)를 토대로 다양한 신제품을 내놓고 있다. 피를 뽑지 않고도 혈당을 알 수 있는 혈당측정기, 피부 아래에 작은 센서를 넣어 주기적으로 혈당을 재는 연속 혈당측정기 등은 현재 개발 중이다.
차 사장은 대학 실험실 벤처기업을 세계 80여 개국에 수출하는 직원 400명, 연매출 1000억 원이 넘는 중견기업으로 키웠다. 지금은 1%인 세계 시장 점유율을 5% 이상으로 높여 매출 1조 원을 달성하겠다는 꿈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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