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의 일이다. 지금은 은퇴한 한 두산그룹 임원의 입에서 불호령이 떨어졌다. 경남 창원시 두산인프라코어 인근 작은 식당. 두산그룹 임직원들을 회식 손님으로 맞은 식당 측에서 맥주 몇 병을 미리 테이블에 올려 두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OB맥주가 아닌 다른 브랜드의 맥주가 올라 있었던 것. 식당 종업원들이 부랴부랴 맥주를 바꿔 놓느라 정신을 뺐다. 박용성 회장 시절의 일화다.
사실 그때만 해도 이미 OB맥주는 두산을 떠난 상태였다. 박용곤 명예회장 임기 말인 1995년부터 사업구조 개편에 나선 두산은 2001년 ㈜오비맥주(옛 동양맥주)를 벨기에계 주류회사인 인터브루에 팔았다.
그래도 OB는 한때 두산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브랜드다. 그렇다 보니 동양맥주로 입사해 한때 지점장까지 지낸 그 임원에게 OB맥주는 계열사 여부를 떠나 무엇보다 애착이 가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일반인들에게도 두산이라는 기업명보다 OB라는 브랜드가 더 친근했다. ‘불사조’ 박철순이 22연승을 거두던 프로야구 원년(1982년)의 한국시리즈 우승팀도, ‘첫 서울 홈런왕’ 김상호가 홈런, 타점은 물론 최우수선수(MVP)상까지 휩쓸었던 1995년의 한국시리즈 우승팀도 두산 베어스가 아니라 OB 베어스였다. 2001년에야 베어스는 처음으로 두산이라는 기업명을 팀 이름 앞에 달고 한국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기업이 시대에 맞춰 변화하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실제로 많은 기업이 변화를 통해 발전하고 성장해왔다. 삼성이 글로벌 선도 기업으로 올라선 것도 반도체 사업 진출이 계기가 됐다. 섬유 제조업에서 출발한 SK는 석유화학과 이동통신에 이어 반도체 사업까지 영역을 넓혔다.
두산 역시 한국 기업사(史)에서 가장 드라마틱하게 업종을 전환한 기업 중 하나다. 포목을 주로 취급하던 ‘박승직 상점(商店)’을 뿌리로 둔 만큼 두산은 오랜 기간 유통과 소비재, 주류, 식음료 등에 사업의 기반을 뒀다.
이 때문에 박용성 회장 이후 박용현, 박용만 회장까지 이어진 ‘오너 3세’ 경영자의 역할은, 결국 ‘OB맥주의 그림자’를 벗어나는 것으로 요약된다. 2005년 ‘형제의 난’이라는 내홍에도 불구하고 두산이 소비재 기업에서 산업재 기업으로 탈바꿈하는 과정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됐다. 2001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 2004년 고려산업개발(현 두산건설), 2005년 대우종합기계(현 두산인프라코어), 2007년 밥캣 등 굵직굵직한 중공업·건설 기업들을 빨아들였다.
내실을 다지기 위한 노력도 병행했다. 동종업계는 물론이고 컨설팅업체와 정부 관료, 인수합병(M&A)한 회사 경영진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인재를 끌어들여 최고경영진에 합류시켰다. 결과적으로 두산은 산업재 시장에 안착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은 다시 바뀌었다. 글로벌 경기가 침체되면서 오히려 건설 및 건설장비 엔진 플랜트 등 중공업 위주로 구성한 포트폴리오가 발목을 잡았다. 두산인프라코어와 두산건설은 2012년부터 지난해까지 영업이익으로 이자도 갚지 못한 ‘좀비기업’이 됐다. 지난해 그룹 전체의 순손실이 1조7000억 원이나 됐다. 두산은 위기다.
이런 경영 환경에서 두산은 조만간 ‘오너 4세’ 경영자인 박정원 회장을 맞는다. 3세 회장들의 역할이 두산의 성격을 바꾸는 것이었다면, 4세인 박 회장의 과제는 두산의 체질을 강화해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을 것이다. 불건전한 재무 구조를 개선하고, 생산성이 낮은 사업 영역을 혁신해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하는 새 먹을거리를 찾아 나서는 일이 우선이다.
두산 베어스 구단주인 박정원 회장은 지난해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며 축하 헹가래를 받았다. 이처럼 프로야구는 1년마다 우승팀이 결정되지만 기업 경영은 그렇지 않다. 박 회장이 경영 성과로 헹가래를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적지 않은 시간과 고통을 수반한 수많은 의사결정 뒤에 판가름 날 것이다.
20년 전 1만8000여 명이던 두산그룹의 임직원은 현재 4만 명 이상, 5조 원대이던 매출은 지난해 18조 원대로 늘었다. 두산의 3세 회장에게 주어졌던 임무보다 4세 회장이 떠맡아야 할 과제가 더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이런 숫자 차이 때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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