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12월 25일. 개인적으로 잊을 수 없는 날이다. 집에서 처음 컬러TV 방송을 봤기 때문이다. 태어난 이후 흑백 방송만 봐왔던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5학년으로서는 신천지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날 TV에서는 리처드 버턴과 엘리자베스 테일러가 출연한 ‘클레오파트라’라는 영화가 방영됐다. 클레오파트라의 알록달록한 의상과 장엄한 이집트 유적이 ‘천연색’으로 나오자 TV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당시 집에서 본 컬러TV는 금성사(현 LG전자)가 내놓은 ‘하이테크’(20인치). 손으로 채널을 돌리는 로터리 타입 채널 다이얼 대신 리모컨을 갖춘 최신 제품이었다.
이 TV는 2000년대 초반까지 필자의 본가 안방을 지켰다. 비슷한 시기 경쟁사 제품을 샀던 친척집에서 10년 남짓 지나 TV를 바꿨던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당시 금성사는 ‘순간의 선택이 10년을 좌우합니다’라는 광고 카피를 사용했지만 실제로는 20년 이상을 좌우한 셈이다. 금성 TV에 대한 좋은 기억 때문인지 필자 가족은 가전제품을 살 때 LG전자 제품에 손이 가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최근 몇 년간 상황이 달라졌다. 주변에서 LG전자 제품을 사는 경우가 눈에 띄게 줄었다. 특히 스마트폰은 LG전자 제품을 사용하는 사람이 손에 꼽을 정도다. 한때 ‘초콜릿폰’과 ‘프라다폰’ 등 인기 피처폰으로 세계 3위 휴대전화 제조업체로 부상했던 LG전자가 최근에는 화웨이 등 중국 업체들에 밀려 7위까지 밀려난 상태다. 세탁기나 에어컨, TV 등 가전제품이 그나마 선방하고 있지만 중국 업체들의 저가 공세에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전자업계에서는 LG전자가 슬럼프에 빠진 원인에 대해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우선 1990년대 말 외환위기 시절 정부가 추진한 ‘빅딜’로 LG반도체가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로 넘어간 것이 결정적이라는 ‘대외 요인설’이 있다. 반도체 사업을 사실상 빼앗기면서 전자사업과 함께 발전할 수 있는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없었던 것이 LG전자가 침체에 빠진 이유라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삼성반도체를 흡수해 기술 및 재무적 시너지 효과를 톡톡히 본 것과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시장이 변화하는 데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내부 요인설’도 있다. 2007년 애플이 ‘아이폰’을 선보이면서 휴대전화의 대세가 스마트폰으로 바뀌는 상황에서 피처폰에 안주하다가 시장을 잃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당시 경쟁사인 삼성전자가 발 빠르게 스마트폰으로 사업구조를 바꿔 판매량 기준 세계 1위 업체로 올라선 것과는 대조적이다.
창사 이후 강조돼 온 기술 중시 전략이 약화됐다는 ‘초심 상실설’도 나온다. LG전자는 과거 ‘기술의 금성’이라는 광고 카피를 쓸 정도로 연구개발(R&D)을 중시했다. 하지만 2007년 남용 부회장이 대표이사로 취임하면서 R&D보다는 마케팅을 중시했다. ‘LG전자는 제품은 잘 만들지만 마케팅이 부족하다’는 외부 평가를 반영한 것이었지만 결과는 실적 악화로 이어졌다.
오랜 기간 ‘겨울잠’을 자고 있던 LG전자가 최근 들어 깨어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31일 나올 전략 스마트폰 ‘G5’ 때문이다. 그동안 국내외 스마트폰 시장에서 수세에 몰렸던 LG전자가 과거 실패를 교훈 삼아 드디어 ‘물건’을 만들었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들린다. 재계에서는 LG전자가 기술을 중시하는 초심으로 돌아가 만든 결과물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기술의 금성’ 정신이 살아났다는 얘기다.
재계 일각에서는 야심작인 G5가 실패하면 LG전자가 더 흔들릴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LG전자에 더 이상 기대할 게 없다는 이유에서다. LG전자로서는 ‘기회’이자 또 다른 ‘위기’인 셈이다.
G5가 성공하면 LG전자만 좋은 게 아니다. 수많은 협력업체도 과실을 공유할 수 있다. 평택공장에서 생산하는 만큼 국내 경제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상대적으로 클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에도 결코 나쁜 일이 아니다. 단기적으로는 프리미엄 스마트폰 시장을 일부 잠식당할 수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경쟁구도가 형성되면서 품질경쟁력을 끌어올릴 수 있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한때 새누리당 대표실 백보드에 있던 구호들을 LG전자 측에 들려주고 싶다. ‘정신 차리자 한 순간 훅 간다’와 ‘잘하자 진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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