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초 국회에서 ‘인성교육진흥법’이 통과돼 지난해 하반기부터 시행되고 있다. 과연 인성교육을 법으로 지정하고 규제할 수 있는 것인지, 인성교육이 또 하나의 입시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은 아닌지, 여러 가지 걱정과 논란이 많다. 찬반 논란을 떠나 사회 곳곳에서 ‘인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오른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다.
얼마 전 한 기업으로부터 사원을 대상으로 한 인성교육 강의 의뢰를 받았다. 기존에 안전과 관련된 교육을 오랫동안 해오다 보니 안전의 문제도 결국은 ‘인성’으로 귀결되더라는 게 회사 측 설명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직무든 능률이든 안전이든 궁극적으로는 모두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어떤 분이 “인성이 확실하다는 보장만 있다면 우선 채용 대상”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실제로 대학에서 배운 실무 지식은 거의 쓸모가 없어서 어차피 입사 후에는 직무교육을 받아야 하니 학교에서 교양과 인성교육만 제대로 받는다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인성교육이라는 말에는 왠지 불편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교육’이라고 하면 더 잘 아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뜻을 담고 있다. 피교육자들의 입장에서는 “내가 인성이 모자라는 사람인가?”라는 거북한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실제로 인성교육을 의뢰했던 그 기업의 관계자는 필자에게 표면적으로는 ‘인성교육’이라는 말을 자제해 달라고 부탁했다.
사실 인성교육이라는 말을 유학(儒學)적으로, 특히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의미로 풀면 전혀 잘못된 말은 아니다. 인성교육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고귀한 사람의 본성인 인의예지(仁義禮智)를 드러내는 길을 틔우는 방법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인의예지의 인성이 잘 발현될 수 있을까? 인의예지가 무엇인지 열심히 연구해서 이해하고, 구체적 실천지침을 만들어서 교육하고 실천하도록 해야 할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런 식의 인성교육을 하려는 것 자체가 이미 인간의 고귀함, 인간의 본래적 선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어떤 새로운 지식이나 규율을 주입하거나 강요해서는 안 될 말이다.
인성교육은 성선(性善)에 대한 믿음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간사회의 여러 가지 복합적인 이유로 그 선한 본성이 잠시 가려져 있을 뿐 사람은 근본적으로 선한 존재임을 긍정해야 한다. 맹자는 어떤 민둥산을 비유로 들어 이 점을 설명했다. “예전에 우산(牛山)은 나무가 아름다웠다. 그러나 큰 성(城)의 교외에 있다 보니 사람들이 매일 나무를 베어가서 벌거숭이가 되어 다시 아름답게 될 겨를이 없었다. 그래도 밤 동안에는 사람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나무가 자랄 수 있었고, 때때로 내리는 비와 이슬 덕택에 새싹도 틔웠지만, 낮에 소와 양이 또 뜯어 먹어서 저렇게 민둥산이 됐다. 사람들은 민둥산이 된 것만 보고 원래부터 좋은 재목이 없었다고 여기는 것이다.”
인의예지의 본성은 사람의 마음속에 누구에게나 씨앗처럼 존재한다. 인간의 불필요한 욕심을 제거한다면 인의예지의 싹은 온전히 자랄 것이다. 그 씨앗에 물을 주면서 자라기를 기다리는 것이 진짜 인성교육이다.
인성교육의 목적은 단지 윗사람을 잘 따르고 체제에 순응하며 주어진 규칙과 예의를 잘 지키는 ‘착한 사람’을 만들려는 데 있지 않다. 남을 나처럼 아끼고 사랑하며(仁),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며(義), 진심으로 남을 배려할 줄 알고(禮), 옳고 그름을 명확히 판단할 줄 아는 사람(智)이면 된다.
이러한 사람은 사회와 체제에 분명 협조적이겠지만 잘못된 상황에는 반기를 들 줄 안다. 윗사람을 공경하고 존중하지만 그의 잘못을 지적할 줄도 안다. 규칙을 준수하고 예의 바르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규칙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위해 융통성을 발휘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람만이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복한 구성원이 많이 모인 조직이라야 궁극적인 성공을 이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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