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옥스퍼드대 경영학석사(MBA) 과정에 재학 중인 필자는 친구들과 함께 작은 술집에서 잉글랜드와 호주의 2015년 럭비월드컵 예선 경기를 TV로 봤다. 본국 팬들의 응원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는 33-13으로 패배했다. 그리고 역대 개최국 중 처음으로 예선 탈락한 국가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
필자는 ‘이런 결과가 영국의 경제적 손실로 이어질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됐다. 런던비즈니스스쿨의 앨릭스 에드먼스 교수가 하나의 답을 줬다. 그에 따르면 주요 국제 축구대회에서 잉글랜드가 탈락한 다음 날 런던 증시의 주가지수는 경기가 없는 날에 비해 평균 0.5% 하락한다. 주요 럭비대회 탈락의 경우에는 하락폭이 0.15%였다. 이 공식을 이날의 패배에 적용하면 약 30억 파운드(약 5조 원)의 주가가 런던 증시에서 증발했다고 볼 수 있었다.
에드먼스 교수는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팬들의 실망감을 꼽았다. 실제로 필자가 느끼기에도 이날 예선 탈락 후 거리 분위기가 확 가라앉아 버렸다. 스포츠팬들의 ‘팬심(心)’은 주식시장 외에 채권시장에도 영향을 미친다. 잉글랜드의 명문 축구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의 사례를 보자. 2005년부터 2012년까지 박지성 선수가 뛰었던 팀이다.
2005년 미국의 스포츠 재벌 글레이저 가문이 맨유를 약 8억1000만 파운드(약 1조3400억 원)에 인수했다. 이 중 상당 부분은 구단 이름으로 헤지펀드와 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이었다. 따라서 금리 부담이 높았다. 5년 후 맨유는 이자 부담을 줄이기 위해 4억9000만 파운드(약 8100억 원)의 채권 발행을 계획했다. 채권을 판 돈으로 대출을 갚겠다는 생각이었다.
기업이 채권을 발행하면 금융기관이 그 가치를 평가한다. 결과는 참담했다. 금융회사들은 이 채권의 가치를 맨유 예상보다 93∼94% 정도로 낮게 평가했다. 심지어 프랑스계 투자은행의 한 애널리스트는 ‘2009년 이래 최악의 채권 중 하나’라고 혹평했다.
채권 발행 실패의 첫 번째 원인은 물론 맨유가 짊어지고 있던 과도한 부채였다. 하지만 영국 일간지 ‘텔레그래프’는 다른 원인에도 주목했다. 맨유의 홈구장인 올드트래퍼드 스타디움과 캐링턴 연습구장이 채권의 담보로 잡혔던 점이다. 안 그래도 미국 자본이 잉글랜드의 자존심인 맨유를 인수한 것에 대해 잉글랜드인들의 심기가 매우 불편했는데, 팀의 성지(聖地)까지 담보로 잡힌다는 것은 용납하기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분석을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스포츠 산업의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어느 정도는 타당해 보인다.
금융시장은 분명 프로 스포츠 산업의 성장을 도울 수 있다. 주식이나 채권 발행으로 자금을 조달해서 구장 시설을 쾌적하게 만들거나 좋은 선수를 영입해 높은 수준의 경기를 제공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 조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맨유의 사례에서 보듯, 자금 조달 조건에만 집중하다가 팬심을 해치면 역효과를 낼 수 있다.
한국의 프로 스포츠 팀들도 이제 기업의 단순한 마케팅 수단에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생존을 추구하는 기업화 단계에 도달하고 있다. 외국처럼 주식이나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 조달을 시도하는 팀들도 나올 것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사례가 반면교사가 되길 바란다. 조진서 기자 cjs@donga.com 이영호 옥스퍼드대 MBA 학생 전 딜로이트 시니어 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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