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증기기관차 발명 200여 년 만에 ‘제2차 교통혁명’이 시작됐다. 사람들이 필요할 때마다 언제 어디서든 교통수단을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모빌리티(mobility·이동성) 혁명’과 도로와 철도 등 평면 교통 인프라에 구애받지 않는 무인항공기(드론)를 활용한 ‘물류 혁명’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미래 교통기술 경쟁력은 세계 주요 7개국 중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세계의 교통혁명 현장을 둘러보며 한국이 나아갈 길을 모색해봤다. 》
인구 15만여 명의 프랑스 남동부 이제르 주(州)의 소도시 그르노블은 요즘 세계 교통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핫(hot)한 도시’다. 미래 도시 교통의 모습을 보여주는 파격적인 실험이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달 21일 오후 5시경(현지 시간) 그르노블 대학가의 ‘비블리오테크 위니베르시테르’ 트램 역 앞 전기차 충전소. 수업을 마친 학생이 이곳에 주차된 덮개가 있는 오토바이 크기의 1인용 전기차에 올라타고 어디론가 향했다. 특이한 모양의 이 차는 ‘컴스’로 불리는 1인용 공유 전기차. 한국의 전기차보다 크기가 작아 도시의 좁은 길에서도 쉽게 몰 수 있고 전기도 덜 먹어 실용적이라는 게 현지의 평가다.
컴스의 운영사인 TTNI의 세드리크 울테크 프로젝트 매니저는 “그르노블에 전기차 충전소가 27곳이 있는데 대학가의 이 충전소는 상위 10위 안에 들 정도로 이용자가 많다”며 “운전면허를 막 딴 청년들 사이에서 컴스가 인기”라고 말했다. ○ 자동차 소유에서 공유로
그르노블도 과거에는 사람보다 자동차 중심의 도시였다. 1970, 80년대 ‘마이카 시대’로 접어들면서 자동차가 사람을 밀어내고 도심의 주인 행세를 했다. 길은 늘 차로 막혔고 보행자의 안전과 편의는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르노블은 10년 전 ‘시테 리브’라는 자동차 공유(카셰어링) 서비스를 도입해 자동차의 덫에서 벗어나기 위한 실험을 시작했다.
그르노블 대중교통발전협의회(ADTC)에 따르면 카셰어링 도입 후 대중교통 이용량이 8%, 자전거 사용량이 25% 증가했다. 교통체증도 줄었다. 여러 사람이 자동차를 나눠 쓰는 카셰어링의 장점이 검증된 것이다. 나탈리 테프 ADTC 회장은 “카셰어링이 시작되면서 시민들이 차를 ‘사야 하는 물건’이 아니라 ‘필요할 때 이용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며 “구입비는 물론이고 주차비, 차 관리비, 보험료 등이 들지 않아 경제적으로도 이득”이라고 말했다.
다른 도시에서도 다양한 자동차 공유 서비스 모델이 등장하고 있다. 국제교통포럼(ITF)이 2014∼2015년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출발지와 도착지가 같은 시민들이 택시를 함께 타는 ‘택시 공유’를 시도한 결과 도심의 차량은 10%, 주차 면적은 6% 줄었다.
그르노블 시는 오랜 카셰어링 운영 경험을 토대로 2014년 친환경 교통수단인 전기차 공유 서비스를 시작했다.
○ 전기차와 공유경제의 만남
그르노블의 전기차 공유 서비스가 한국과 다른 점은 크게 두 가지다. 도심에 최적화된 1인용과 2인용 전기차(아이로드) 등 70여 대를 도입해 이용자의 선택권과 편의를 배려했다. 소형 전기차를 쓰면 중형차 1대가 주차할 수 있는 공간에 4, 5대를 주차할 수 있게 돼 도심의 좁은 공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자동차 공유 서비스가 ‘왕복형’(차를 인수한 곳에 반납하는 방식)이 아니라 ‘편도형’(목적지 근처에 반납하는 방식)인 것도 특징이다. 마트에 장을 보러 갈 때 차를 반납하고 물건을 산 뒤에 다른 차를 이용해 돌아오면 된다. 이용자의 눈높이에 맞춘 전기차 공유 서비스가 도입되면서 그르노블대 캠퍼스는 자동차를 타고 오는 학생이 줄어 자전거와 보행자의 천국이 됐다.
길이 좁은 유럽의 오래된 도시들은 특히 전기차 공유 서비스를 속속 도입하고 있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카투고’), 덴마크의 코펜하겐(‘드라이브 나우’) 등이 대표적이다. 지난해 ‘자동차 천국’인 미국의 인디애나 주 인디애나폴리스가 전기차 공유 서비스인 ‘블루인디’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서울시도 2013년부터 전기차 셰어링 서비스 ‘나눔카’를 운영 중이다. 하지만 충전소와 차량 관리 서비스 인프라가 부족해 널리 이용되지 못하고 있다. 문영준 한국 교통연구원 교통기술연구소장은 “나눔카와 함께 대중교통 서비스를 연계해 지하철에서 내려 전기차를 빌려 타게 해주는 등 이용자의 편의를 더 배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정부-시민사회-기업의 합작품
그르노블 시의 실험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자동차 소유에서 공유로, 자동차 중심에서 보행자 중심으로 리모델링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반발도 적지 않았다. 올해 1월 간선도로를 제외한 도시의 모든 도로를 저속 전기차가 달릴 수 있게 시속 30km로 제한하자 일부 시민은 “운전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이라며 강하게 반발했다. 시 정부는 시민들에게 “아이들이 편하게 걸어서 학교에 다닐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주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시민단체 등과 토론회를 열고 절충안도 마련했다. 일부 간선도로의 주행속도는 시속 50km로 유지하기로 한 것이다.
전기차 공유 서비스도 그르노블 시가 대중교통 업계와 머리를 맞댄 결과다. 전기차를 편도로 운행할 수 있게 시 정부가 대중교통 환승지점 등 27곳에 카셰어링 주차장을 무료로 제공했다. 프랑스 전력공사인 EDF도 전기차 시장 활성화 취지에 공감하고 이곳에 전기차 충전소를 마련했다.
시 정부는 친환경 교통수단인 전기차와 기존 교통수단이 공존할 수 있도록 제도도 손질했다. 전기차 공유 서비스를 이용하면 버스 등 대중교통 이용료를 깎아주는 것이 대표적이다. 버스나 택시 등으로 쉽게 갈아탈 수 있게 한 것이다. 악셀 드뷔 EDF 프로젝트 수석은 “할인 혜택 덕분에 대중교통 이용도 늘었다”며 “대중교통 이용이 늘어날 수 있다고 설득해 버스나 택시 사업자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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