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현대사에서 1988년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해다. 직선제로 당선된 노태우 대통령이 그해 2월 취임했다. 4월 치러진 13대 총선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 총재의 3개 야당이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면서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가 탄생했다.
경제에서는 대기업 규제를 축으로 하는 경제민주화 바람이 불고 전투적 노동운동이 확산됐다. 권위주의 시절의 억눌린 욕구가 정치민주화로 분출되고 여소야대 정국과 맞물리면서 우리 경제는 중대한 전환점을 맞는다. 경제학자인 좌승희 박사는 2006년 펴낸 ‘신(新)국부론’에서 “국내총생산(GDP), 기업 수익성, 생산성 모두 1980년대 중반 이전 30년 가까이 고도성장했다가 1980년대 후반부터 반전돼 급격한 하락세를 보였다”고 분석했다.
‘1노 3김 시대’보다 상황 심각
4·13총선으로 출범할 20대 국회의 여소야대는 28년 전보다 심각한 파장을 미칠 것 같다. 글로벌 경제 상황은 1980년대 후반보다 훨씬 열악하다. 내년에는 정치세력들이 표를 위해서라면 물불 안 가리고 달려들 대선이 다가온다. ‘1노 3김 시대’의 야당들도 포퓰리즘에 약했지만 적어도 운동권 세력에 휘둘리진 않았다.
총선 다음 날인 14일 만난 언론인 출신의 기업 임원은 20대 국회에 대해 걱정하는 분위기가 역력했다. “박근혜 정부도 기업에 잘해준 건 없지만 지금 같은 야당에 여소야대까지 되면 기업들을 괴롭히는 일이 더 늘어나겠지요.”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와 피치가 ‘이번 총선 결과가 한국의 국가신용등급과 잠재성장률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경고하고 나선 것도 심상치 않은 조짐이다.
여소야대 자체를 경제 악재라고 단언하고 싶진 않다. 집권당이 좌파 색깔이 강한 나라에서 시장경제적 개혁을 지지하는 야당이 약진하면 오히려 국내외 투자자들에게 긍정적 신호를 줄 수도 있다. 한국이 직면한 문제의 핵심은 좌향좌 여소야대의 폐해가 기승을 부릴 위험성이 높아졌다는 데 있다.
법인세 인상, 청년고용 할당제, 이익공유제, 중소기업 적합업종 확대 같은 야당의 총선 공약은 반(反)시장-반기업 성격이 농후하다. 걸핏하면 기업인들을 국회로 불러내 호통치고 망신 주는 갑(甲)질을 막기도 어려워졌다. 당 대표가 특정 기업 구조조정을 막겠다고 공언한 집권여당도 미덥지 않긴 마찬가지다.
협치(協治)란 말은 좋지만 정치적 수사(修辭)에 그칠 공산이 크다. 경제난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으면서도 ‘문제는 경제야’라고 목소리를 높여 총선에서 재미를 본 야당은 현 정부의 경제성적표가 나쁠수록 대선에서 유리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공병호 박사는 “세상에는 마땅히 옳은 일이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것과 실제로 옳은 일을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면서 박근혜 정부가 남은 임기 중 순항하도록 야당이 도울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전망했다.
‘국운 기울기’ 시점 당겨지나
지난해 타계한 대만계 일본 역사소설가 진순신(陳舜臣)의 저서 ‘중국의 역사’에서 당나라 후반기를 다룬 부분을 보면 ‘여광(餘光)’이란 표현이 나온다. 국운은 기울었지만 선조들이 쌓아놓은 업적 덕분에 상당 기간 망하진 않고 버티던 때를 ‘해나 달이 진 뒤에 은은하게 남는 빛’으로 비유한 것이다. 나는 작년 7월 이 칼럼에서 ‘한국의 국운은 한계에 왔나’라고 썼다. 여소야대 국회가 좌향좌로만 치닫는다면 20세기 후반 기적의 성취를 일궈낸 한국경제의 여광마저 사라지고 캄캄한 어둠을 맞게 될 시점이 한층 앞당겨질 것이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