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수사 좁혀오자 떠밀려 발표… ‘영혼없는 사과’ 논란
홍보담당자-대행사 연락처만 기재… “전화대신 문자-메일 질문에만 답변”
이른바 ‘죽음의 가습기 살균제’를 제조해 정부 집계로만 최소 103명이 사망한 원인을 제공한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가 21일 사건 발생 5년 만에 처음으로 공식 사과했다. 하지만 강도 높은 검찰 수사와 비난 여론에 등 떠밀려 마지못해 내놓은 ‘성의 없는 사과’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옥시는 외국에서 정화조 청소용으로 주로 쓰이는 화학물질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성분으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판매해 가습기 살균제 참사의 최대 가해자로 지목됐다.
○ 옥시, 홍보대행사 통한 e메일 사과
옥시는 21일 오후 3시 20분경 홍보대행사를 통해 ‘가습기 살균제와 관련하여 말씀드립니다’라는 제목의 e메일을 기자단에 갑자기 보내 “조금 더 일찍 소통하지 못해 피해자 여러분과 그 가족 분들께 실망과 고통을 안겨 드려 진심 어린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 밝혔다. 이어 “가습기 살균제 관련 환자와 가족을 지원하기 위한 모든 논의와 대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겠다”며 2014년 50억 원에 이어 이번에 50억 원을 추가로 출연해 총 100억 원 상당의 피해보상 기금을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옥시의 사과를 놓고 18일 롯데마트의 첫 대국민 사과 이후 여론을 의식해 50억 원을 피해보상으로 추가 지원하는 선에서 사태를 무마하려는 의도가 아니냐는 시선이 많다. 자사 임직원의 형사책임 가능성을 의식한 듯 옥시는 사과문 곳곳에서 법률적 검토를 거친 계산된 발언으로 보이는 표현을 많이 사용했다. 사과문에서 “오랫동안 안전관리수칙을 준수해 이런 상황에 직면한 적이 없다”고 밝힌 대목과 검찰 수사로 제기된 각종 의혹에 대해 “회사 정책상 이런 의혹 관련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 부분이다. 이는 옥시가 그간 충분한 주의의무를 다해 제품을 만들었다는 기존 입장을 강조한 것이다. 또 일부 임직원의 현행법 위반이 있더라도 회사 차원의 지시나 개입은 없었다며 꼬리 자르기를 하려는 의도가 깔린 사과일 가능성이 있다고 법조계에서는 보고 있다.
○ 피해자들 “살인 기업은 감방에 가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환경보건시민센터 등 피해자 측은 “옥시 측의 사과는 사과가 아니라 입장발표문”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피해자 측은 e메일이 공개된 지 1시간 반 만에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5년이 다 되도록 옥시는 단 한 번도 피해자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며 “옥시의 사과는 받지 않겠다. 살인 기업은 감옥에나 가라”고 옥시의 사과문을 조목조목 반박했다.
피해자들은 옥시가 보상기금으로 50억 원을 내놓겠다는 말에도 “당신들의 친구, 환경부에 기탁한 것 아니냐”는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실제로 옥시가 2014년 3월 기탁한 기부금은 현재까지 피해자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다. 환경부에 따르면 현재 이 돈은 기금의 용도가 결정되지 않아 은행에 고스란히 남아 있고 이자가 쌓여 51억2000만 원으로 불어났다. 환경부 관계자는 “법적으로 기부금 형태이기 때문에 옥시가 세제 혜택을 봤다”고 말했다.
한편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 형사2부장)은 옥시의 사과와 관계없이 철저하게 수사할 방침이다. 검찰은 인체에 안전한 성분을 사용했다는 허위광고를 한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22일 옥시 측 관계자 3명을 소환한다. 옥시레킷벤키저의 ‘옥시싹싹 가습기당번’ 제품 겉면에는 ‘살균 99.9% 아이에게도 안심, 인체에 안전한 성분을 사용해 안심하고 쓸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 ‘855자 사과문’ 회사-임원 명의도 없어
855자.
2011년 11월 11일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회수 및 수거를 명령한 지 1623일 만에 옥시레킷벤키저가 내놓은 공식 사과성명(statement)의 글자 수다. 사람에게 해로운 원료로 가습기 살균제를 만들어 지금까지 최소한 103명을 사망에 이르게 한 옥시의 ‘진심 어린 사과’를 읽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옥시가 21일 오후 기자들에게 보낸 e메일 사과문에는 한국법인 홍보담당자 1명과 홍보대행사 직원 2명의 연락처가 적혀 있었다. 대표 등 책임 있는 임원 또는 회사 명의의 문서가 아닌 약식 문서인 셈이다. 그나마 한국법인 홍보담당자는 “전화로는 응대가 힘드니 문자나 e메일로 질문하면 답변하겠다”는 태도로 일관했다.
옥시 측은 이날 사과에 대해 “영국 본사와 협의하지 않고 한국법인이 자체 결정한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본사의 승인이나 조율 없이 한국법인에서 자체적으로 사과의 뜻을 밝히긴 어려웠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사과문은 상당 부분이 번역 투다.
장관석 기자 jks@donga.com·신나리 기자 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김성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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