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이었다. 경기 과천시의 한 대형 음식점에서 기획재정부 고위 공무원들과 출입기자들이 송년회를 열었다. 윤증현 당시 장관이 단상에 섰다. 양복 윗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인사말 자료를 꺼내다가 “아이고 마, 오늘은 그냥 생으로 할란다”라고 말하며 마이크를 잡았다.
“출입기자 여러분, 지난 1년간 정말 수고 많았습니다. 한국 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빠르게 회복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애정 어린 관심과 조언 덕분입니다. 진심입니다.”
정면 스크린에는 신문기사의 제목들이 나열돼 있었다. 2009년에는 ‘위기’ ‘사상 최악’ ‘도산’ 등 단어들로 도배됐지만 2010년엔 ‘회복’ ‘성장’ ‘도약’이란 단어들이 가득 차 있었다. 실제 2010년 한국 경제성장률은 6.5%를 기록하며 세계가 깜짝 놀랐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는 ‘교과서에 나올 법한 회복(Textbook recovery)’이라고 평가했다.
송년회 이후 정확히 5년이 흐른 지난해 말, 서울 여의도 윤경제연구소에서 윤 전 장관을 다시 만났다. 조선, 해운, 철강, 건설 등 한국 성장을 이끈 주력업종들이 추락하고 있을 때였다. 기자는 “금융위기 이후 구조조정을 제대로 하지 않아 일부 업종이 또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는 평가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윤 전 장관은 “일리가 있다. 내가 기재부 장관 할 때 경기 회복을 우선하느라 구조조정을 소홀히 했던 점 인정한다. 당시 두 가지를 동시에 할 수 없었다. 내가 퇴임한 이후에라도 정부가 강력하게 구조조정을 했어야 했는데….” 윤 전 장관은 글로벌 금융위기로 한국 경제가 휘청거리기 시작했던 2009년 2월에 기재부 장관으로 취임한 뒤 2011년 6월에 떠났다.
금융위기 극복 과정에서 미뤄뒀던 산업 구조조정이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유일호 기재부 장관은 기존 공공 노동 금융 교육 등 4대 개혁에 산업개혁을 더한 ‘4+1개혁안’을 밝혔다. 지금까지 구조조정을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해 온 야권에서도 ‘적극적 구조조정’을 외치고 있다.
현재 위기는 1997년 외환위기와 비슷한 측면이 있다. 외환위기 때 대기업은 무한정 은행 빚을 내며 차입경영을 펼쳤다. 부채에 의한 과잉설비가 결국 위기를 촉발시켰다. 지금도 조선 해운 철강 석유화학 등 일부 업종에서 공급과잉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위기의 범위가 한국만이 아니라는 점도 공통적이다.
다만 외환위기 때 한보그룹을 시작으로 기업들이 ‘줄 도산’을 맞았고 이 기업들에 돈을 빌려줬던 은행들도 위기에 내몰렸지만, 현재 그 수준은 아니다. 구조조정을 통해 최악의 상황을 막을 기회가 아직 있는 셈이다.
문제는 구조조정이 말처럼 쉽지 않다는 점이다. 기자는 특히 두 가지 요건이 성공적 구조조정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본다.
첫째, 고통 감내에 대한 국민적 공감대다. 구조조정은 많은 이해관계자에게 고통을 준다. 상당수 국민이 피와 땀을 흘려야 한다. 그렇기에 지도자는 장밋빛 전망을 이야기할 게 아니라 곧 뒤따를 고통을 솔직하게 밝히고 공감대를 이끌어내야 한다.
1940년 5월 13일 영국 보수당 의원 윈스턴 처칠은 의회 연설에 나섰다. 당시 히틀러의 나치 독일군이 파죽지세로 프랑스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고, 다음 타깃은 영국이 분명했다. “저는 국민들에게 해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국민들에게 요구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피와 땀과 그리고 눈물입니다.” 지금 한국 지도자에게 필요한 것도 그런 솔직함이다.
둘째, 국회의 협력이다. 기업이 자율로 구조조정을 하든, 정부가 주도적으로 나서든 국회가 발목을 잡으면 구조조정은 진행될 수 없다. 윤 전 장관은 “한국경제가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조속히 일어설 수 있었던 것은 국회 덕이 매우 컸다. 경기 활성화 대책들에 대해 국회가 초당적으로 협력을 해 줬다. 지금도 협조해 준 국회의원들에게 감사해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정부와 정치권이 외치고 있는 구조조정이 일회성으로 끝날지, 아니면 한국경제의 체질을 바꿀지 조만간 판가름 날 것이다. 이번에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다음 정권으로 짐이 넘어가고, 국민이 가장 큰 피해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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