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오전 서울중앙지검에 모습을 드러낸 신현우 전 옥시레킷벤키저(현 RB코리아) 대표이사(68)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임신부와 영유아 140여 명이 목숨을 잃은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이 발생한 지 5년 만이다. 검찰에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된 첫 가습기 살균제 제조업체 핵심 관계자의 첫마디는 피해자들에 대한 사과가 아닌 ‘진실 규명’이었다.
신 전 대표는 정부 집계 기준 103명이 사용해 숨진 것으로 알려진 ‘옥시싹싹 New 가습기 당번’을 최초로 출시하고 판매했던 2001년부터 2005년까지 옥시의 대표였다. 이날 감색 양복 차림에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선 신 전 대표는 “가습기 살균제가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고 말했다. 또 가습기 살균제를 최초로 개발했느냐는 물음에 “저희(옥시)가 한 게 아니라 SK가 가습기메이트를 출시했다”고 답한 뒤 “피해자와 유가족들께 진심으로 죄송하다”는 말을 마지막으로 검찰청사 안으로 들어갔다.
피해자 가족 모임 10여 명은 ‘옥시는 피해자와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라’ 등이 쓰인 피켓과 수건을 들고 신 전 대표를 향해 “진실을 밝혀라”라고 날카롭게 외쳤다. ‘내 아내를 살려내라’는 문구가 적힌 노란 조끼를 입고 항의하던 가족 일부는 오열하며 쓰러졌다.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이철희 형사2부장)은 신 전 대표를 조사하면서 유해성을 알고도 제품을 출시하고 판매한 과실이 있는지 등을 따져 업무상 과실치사·치상 혐의 적용을 검토하고 있다. 신 전 대표는 이날 조사에서 유해성 인지와 관련된 일부 혐의는 부인하면서도 일부 의혹은 자백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이날 폴리헥사메틸렌구아니딘(PHMG) 인산염 성분을 넣은 최초 제품 개발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던 김모 전 옥시연구소장과 최모 선임연구원도 피의자 신분으로 불러 조사했다. 수사팀은 특히 옥시 측이 외부 연구자문위원 등으로부터 PHMG 성분을 기체 상태에서 흡입할 때 인체에 유해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고서도 흡입독성 실험을 하지 않은 경위를 집중 추궁했다. 검찰은 이들을 2, 3차례 더 조사해 외부 경고를 묵살한 경위, 흡입독성 실험을 하지 않은 채 제품을 출시하도록 승인한 최종 결재선이 누구인지 등을 확인해 신 전 대표 등의 책임 유무를 가릴 계획이다.
한편 또 다른 가해 업체인 홈플러스(15명 사망)도 이날 피해자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다. 올해 1월 신임 대표이사에 취임한 김상현 홈플러스 사장은 26일 신사옥 이전 기자간담회에서 “피해자들의 고통에 진심 어린 유감과 사과의 뜻을 밝힌다”며 “가습기 살균제 피해 보상을 위한 전담기구를 통해 원활한 보상이 이뤄질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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