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외국 순방 때 대통령, 장관, 공공기관장 등이 체결한 양해각서(MOU)는 389건에 이른다. 이것만으로도 ‘역대 최다 MOU 대통령’이다. 다음 달 1∼3일 이란 방문 때 400건을 돌파할 가능성이 높다. 어떤 대통령도 이 기록을 깨기는 어려울 것이다.
MOU는 법적 구속력이 없다지만 경제협력에 이렇게 매진했는데 수출이 1분기에만 1.7% 감소하는 최악의 부진에 빠졌다는 건 뭔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는 신호다. 대통령 도장 값이 이것밖에 안 되나. 대통령 빛내려는 퍼포먼스
MOU는 이해 당사자가 서로의 사정을 널리 헤아리기로 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다. 각서라고 번역하지만 효력은 메모 수준에 가깝다. 그래도 국가 간 신의성실의 원칙을 간과할 수는 없다. 특히 대통령 순방 때 서명한 문서는 무게감이 다르다.
박 대통령이 이달 2∼5일(현지 시간) 멕시코 방문 때 체결한 34건의 MOU를 두고 청와대는 “사상 최대의 경제협력 성과”라고 자랑했다. 이 34건 중 ‘전자상거래 진출 지원 MOU’를 한국 KOTRA 홈페이지에서 열어봤다. KOTRA와 멕시코 최대 온라인 쇼핑몰인 리니오가 작성한 2쪽짜리 문서에는 KOTRA가 한국의 수출 중소기업 정보를 성심껏 제공하는 대신 리니오는 좋은 한국 상품을 발굴하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외교적 수사로 봐도 무방할 정도지만 ‘법적인 구속력은 없다’고 명시돼 있다. 잘되면 다행이고 안 돼도 그만인 게 MOU다.
대통령 순방 때 체결한 MOU 덕분에 교착상태에 빠진 현안이 해결된다면 이상적이다. 2014년 7월 박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한중 정상회담에서 체결한 각종 MOU는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타결의 촉매제가 됐다. 반면 대다수 MOU는 대통령을 빛나게 하는 액세서리에 그친다. 액세서리를 더 화려하게 꾸미려고 관료들은 기업을 귀찮게 하고, 기업은 협상 속도를 조절하며 대통령 순방 날짜를 기다린다.
MOU가 성과를 내려면 개별 기업의 이해관계, 정치 환경, 글로벌 시장 동향이라는 세 박자가 맞아야 한다. 2013년 2월 24일 이명박(MB) 당시 대통령과 태국의 잉락 친나왓 총리는 청와대에서 면담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2012년 8월 체결한 ‘수자원 기술협력 MOU’를 이행하자고 다짐 또 다짐했지만 결국 흐지부지됐다. 잉락 총리가 그 후 군부에 의해 축출됐고 박근혜 정부는 4대 강과 연관된 사업을 꺼렸다. 국가 수반들끼리 합의해도 환경이 여의치 않으면 한 걸음도 못 나간다.
정부가 여전히 MOU 외교에 목을 매니 딱하다. 윤병세 외교부 장관은 박 대통령의 이란 방문을 앞두고 MOU, 조약 등 각종 문건 체결 건수가 40건에 이르고 한국-이란 경협 규모가 100억 달러를 넘을 것이라고 홍보하고 있다. 중동지역에 투자 유치 수요가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MOU가 만능 키는 아니다. 과대 포장, 그만하면 좋겠다.
경제사절단과 조찬이라도 하라
경제계에선 “순방 길 따라가 봐야 대통령과 말 한번 나눠볼 기회가 없고 들러리만 선다”는 볼멘소리가 나온 지 오래다. 그런데도 이번 이란 경제사절단 규모가 200명을 넘어 역대 최대 규모라는 소식은 의외다. 정부의 독려도 있었겠지만 새 시장에 대한 민간의 기대가 그만큼 크다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다.
박 대통령은 현지에서 조찬모임이라도 하면서 기업인들이 원하는 정부의 역할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대통령 자신을 ‘빛나는 조연’으로 내리고 기업인들을 주연으로 올리는 건 MOU 몇 건에 비할 수 없는 성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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