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환위기 한 달 전인 1997년 10월 미국 컨설팅회사 ‘부즈 앨런 앤드 해밀턴’이 한국경제에 관한 보고서를 내놓았다. 한국은 경제 기적이 끝나고 저임금의 중국과 고기술의 일본이라는 호두가위(넛크래커)에 낀 처지라고 분석한 내용이었다. 놀랄 만한 연구와 제안이 있었지만 실질적 조치는 취해지지 않아 ‘행동은 없고 말만 무성하다(words without deeds)’는 지적도 했다. 김영삼 정부의 노동개혁과 금융개혁이 정치사회적 논란으로 지지부진한 데 대한 일침이었다. 정권마다 반복되는 한국病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NATO 공화국’이란 말이 유행했다. 말만 있고 행동은 없는 ‘No Action Talk Only’의 약칭이다.
당시 청와대는 “참여정부는 (청사진을 먼저 만든 뒤 실천하는) 로드맵 퍼스트, 액션 레이터 정부다. 로드맵과 매뉴얼의 개혁 프로그램이 250개나 된다”라고 반박했지만 시중의 반응은 차가웠다. 진념 전 경제부총리는 2005년 한 특강에서 이렇게 충고했다. “정부는 한국의 보편가치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원칙을 정책 지향점으로 삼고 있는지부터 분명히 밝히라. 말만 있는 NATO, 로드맵만 있는 NARO(No Action Roadmap Only), 계획만 있는 NAPO(No Action Plan Only) 같은 말이 나오지 않게 하라.”
그제 나온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한국경제 보고서는 외환위기 전야(前夜) ‘부즈 앨런 앤드 해밀턴’ 보고서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이 단기간에 발전했지만 생산성 정체, 수출부진 등으로 활력을 잃었다는 진단은 흡사하다. 상품·서비스시장 규제개혁과 노동시장 유연성 제고라는 처방은 국내 전문가들도 강조하는 내용이다. 문제는 정답을 답안지에 쓰지 못하는 현실에 있다.
사회당 정권인 프랑스에서도 노동시장 유연화 움직임이 한창인데 한국 노동계와 정치권의 ‘자칭 진보’는 꿈쩍도 않고 저항한다. 새로운 투자와 일자리를 만들어낼 서비스산업 규제 혁파, 농업 분야의 기업화와 시장화도 말만 무성하고 결과는 초라하다.
강만수 전 재정경제부 장관은 저서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서 “미국 같은 선진국에도 임기 말 레임덕 현상이 있는데 우리는 말할 필요가 없다”며 경제에 임기가 없다는 것은 환상이라고 했다. ‘수도(首都) 권력’에 이어 입법 권력까지 야당에 넘어간 정치구도에서 임기 말 박근혜 정부가 눈에 띄는 개혁 성과를 낼 것으로 나는 기대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이 조금이라도 전진하는 쪽으로 기존 정책의 결과물을 내놓고 위기관리에만 성공해도 다행일 것이다.
권한 커진 巨野를 주목한다
규제개혁과 노동개혁의 발목을 잡아온 야당들이 시침 뚝 떼고 정부만 비난하는 데 대한 곱지 않은 시선도 있지만 정치적으로는 이해 못 할 바가 아니다. 다만 그 대안이 대기업을 옥죄고 때려잡으면 나머지 국민이 잘살 수 있다는 식의 접근이라면 한국병(病)에 시달리는 경제를 더 질곡으로 몰아넣을 위험성이 농후하다. 권한과 책임이 커진 거야(巨野)가 시장친화적 개혁을 계속 가로막거나, 나아가 성장동력을 더 추락시킬 법안을 쏟아낸다면 내년 대선에서 집권하더라도 심각한 어려움에 직면할 것이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아시아 외환위기 이후 ‘파블로프의 개는 이보다 더 빨리 배웠다. 그들(아시아 국가들)은 배우기 전에 얼마나 많이 고통을 받아야 할까’라고 썼다. 위기 경보음이 곳곳에서 울리는데도 한 발짝도 제대로 나가지 못하는 ‘NATO 공화국’의 서글픈 현실이 안타깝고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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