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공손추 하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옛 군자는 잘못을 하면 고쳤는데, 지금의 군자라는 자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멈추지 않고 또 합니다. 옛 군자의 잘못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았습니다. 잘못을 저지르면 사람들이 다 쳐다봤다가도, 고치면 사람들이 다시 그를 존경하지요. 그런데 지금의 군자는 잘못을 계속 저지를 뿐만 아니라 거기에 대고 변명까지 늘어놓는군요.”
누구나 인생을 살면서 잘못을 저지른다.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또는 재수 좋게 들키지 않았든 재수가 없어 들켰든, 일상의 작은 실수에서 큰 사고에 이르기까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전혀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해칠 것이다. 설령 그럴 수 있다 하더라도 ‘너무 맑은 물에는 물고기가 살지 못한다’는 말처럼 그에게는 사람들이 다가서기 어려울 것이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성인(聖人)도 잘못을 하는 일이 있고, 때로는 망가지는 면도 있다. 또 그것이 인간미다.
다른 것은 잘못에 대한 사후 처리다. 첫째, 군자는 잘못을 인정할 줄 안다. 이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는 보통 잘못을 인정한 후에 벌어질 사태들이 두려워 잘못을 숨기려 하지만, 그것이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경우를 수없이 목도한다. 잘못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둘째, 잘못을 인정한 군자는 그것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반대로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고치려 하지 않을뿐더러 심지어 그에 대한 합리화의 변명을 줄줄이 늘어놓게 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유명인들이 친 ‘사고’ 소식을 접한다. 연예인이나 스포츠맨의 잘못은 눈살 찌푸리고 혀 차는 정도로 지나갈 수 있다. 하지만 존경의 대상이 돼야 할 소위 ‘지도층’의 잘못은 사회적 파장이 만만치 않다.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은 사회 구성원들의 정의감과 가치 판단의 기준, 사회 전반의 분위기 형성에 큰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것이 지도층들이 일식과 월식처럼 잘못을 인정하고 개선하는 데 힘써야 하는 이유다. 사람들이 더이상 눈살을 찌푸리지 않고, 정당하게 사는 사람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는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서라도 지도층의 잘못이 반복돼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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