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26km 서킷 24시간 돌고 또 돌고… 車들의 철인3종 경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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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레이스’ 독일 뉘르24 가 보니

28일(현지 시간)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에서 열린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레이스’에 출전한 차들이 굉음을 내며 출발하고 있다. 이날 오후 3시 반부터 24시간 동안 진행된 경주에서 총 159대의 차 중 101대만 완주했다. 완주에 성공한 현대자동차(133번)의 모습도 보인다. 현대자동차 제공
28일(현지 시간)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에서 열린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레이스’에 출전한 차들이 굉음을 내며 출발하고 있다. 이날 오후 3시 반부터 24시간 동안 진행된 경주에서 총 159대의 차 중 101대만 완주했다. 완주에 성공한 현대자동차(133번)의 모습도 보인다. 현대자동차 제공
비가 내려 질척해진 흙바닥 위에 펼쳐진 차들과 텐트 사이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 연기를 기계의 굉음이 휘감았다. 여기저기서 헬기와 드론이 떠올라 ‘전쟁터’를 비춘다. 아침의 찬 부슬비를 막기 위해 비옷을 입은 사람들은 ‘녹색지옥’을 숨죽이고 지켜본다. 쫓고 쫓기는 자들이 경주를 펼치는 가운데 스스로의 속도를 이기지 못한 이들은 결국 서로 부딪치고 뒤섞여 다시 뛰지 못했다.

난민촌 옆 전쟁터의 모습일까? 아니다. 이 사람들은 밤새 모닥불을 지피고 바비큐에 맥주를 즐기다 아침이 되자 서킷을 달리는 차들의 거친 엔진음을 즐기러 모인 사람들이니까. 빗길에 차가 미끄러지고 중도 포기하는 차들이 늘어갈수록, 그 한계를 이겨내고 완주에 성공한 차들의 가치는 더 빛나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자동차가 벌이는 철인3종 경기라고 할 수 있다. 올해 대회가 더 특별한 것은 한국 기업이 만든 차가 완주와 함께 우수한 성적도 거뒀기 때문이다. 일주일 전 기자가 찾아가 본 독일 ‘2016 뉘르부르크링 24시 내구레이스(ADAC Zurich 24h Race·뉘르24)’ 얘기다.

극한의 주행조건… 폭우로 경기 중단돼

뉘르24는 1970년부터 독일 중서부에 있는 뉘르부르크링 서킷에서 열리고 있는 24시 내구레이스다. ‘모터스포츠의 성지’로 불리는 뉘르부르크링은 숲으로 둘러싸인 북쪽의 노르트슐라이페(Nordschleife·20.8km)와 관중석이 있는 GP-슈트레케(GP-Strecke·5.1km)로 나뉜다. 노르트슐라이페는 높낮이 차가 최대 300m에 이른다. 도로 폭이 좁은 데다 코너가 총 73개나 되는 극한의 도로환경을 갖춰 세계 유명 자동차 업체들이 주행 성능 시험을 하는 곳이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녹색지옥’. 뉘르24는 길이 26km의 서킷을 레이서 4명이 교대로 운전해 24시간 동안 가장 많이 도는 차가 우승하는 방식이다. 하지만 워낙 주행조건이 혹독해 사고 없이 경기를 끝마치기만 해도 평균 이상은 하게 된다.

대회 기간에 이곳을 찾는 사람은 대략 20만 명 안팎. 관중석에 앉아 경주를 지켜보는 사람도 많지만 대부분은 노르트슐라이페 주변 곳곳에서 캠핑을 하며 서킷을 지켜본다. 기자가 현장에 도착한 지난달 28일(현지 시간)은 이미 예선전이 열린 26일부터 진을 치고 있는 캠핑카와 텐트들로 꽉 차 있었다. 야외에서 며칠씩 진행되는 거대한 록음악 축제에 온 듯한 느낌이었다.

경기가 시작되는 28일 오후 3시 반이 다가오자 서킷 주변 마을은 골목골목이 독일 전역에서 온 차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경기가 아니라 관중이 타고 온 다양한 차만 구경해도 시간이 금방 가는 듯했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왔다. 행사장 입구에 ‘AMG(메르세데스벤츠의 고성능 브랜드)’, ‘M(BMW의 고성능 브랜드)’, ‘Audi’ 등 깃발을 든 사람들로 축제 분위기가 고조됐다.

경기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약 1시간. 본격적으로 경기가 시작되기 전 관중이 출전하는 차량을 가까이서 보고 사진도 찍을 수 있는 ‘그리드워크’가 시작됐다. 지나다니기가 힘들 정도로 사람이 많은 반면, 국내 모터스포츠 행사에서 그리드워크를 가득 채우는 레이싱모델은 많지 않았다. 모델들의 옷도 몸에 붙는 정도일 뿐 노출은 많지 않았다. 그야말로 차와 레이서가 주인공이었다.

줄지어 출발선에 늘어선 차량 159대 중 익숙한 모습의 차량 3대가 있었다. 바로 현대자동차 독일판매법인이 출전한 것. 벨로스터와 i30 차체 모델은 그간 1.6L 개조 터보엔진 차량 클래스(SP2T)에 꾸준히 출전해 왔지만 올해는 특별한 차가 한 대 더 있었다. 바로 현대차가 고성능 브랜드 ‘N’을 위해 개발 중인 2.0L 터보엔진을 장착한 차(N카)가 2.0L 개조 터보엔진 차량 클래스(SP3T)에 출전한 것. 빠르고 강력하면서도 혹독한 주행 조건을 견딜 수 있는 고성능 차량을 개발하기 위해 이번 대회를 시험대로 삼은 셈이다. N카는 겉 차체만 i30일뿐 내부 부품은 개발 중인 엔진과 부품으로 가득 찼다.

오후 3시 반 ‘녹색지옥’의 문이 열렸다. 맑던 날씨는 기다렸다는 듯 흐려지더니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경기 시작 45분 후 코너에서 차들이 미끄러지며 서로 부딪치는 사고가 속출했다. 다시 15분 후 산에서 흙이 내려와 도로를 덮어버렸다. 붉은 깃발이 휘날렸다. 경기 중단 신호였다.

선수에겐 전쟁, 관중에겐 축제

경기는 3시간 동안 중단됐다가 도로가 복구된 뒤 재개됐다. 피트(정비지역)에서 대기하던 차들도 다시 굉음을 내며 달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해가 지면서 서킷엔 어둠이 찾아 왔다.

GP-슈트레케의 관중석은 비어갔지만 노르트슐라이페에서 캠핑을 하는 관중은 이때부터 시동을 건다. 독일인답게 맥주를 한 손에 들고 모닥불에 통돼지 바비큐와 소시지를 구우며 노래를 부른다. 야외용 간이 튜브 풀장에서 노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이들에게 뉘르24는 경주가 아니라 축제다.

29일 날이 밝은 뒤 노르트슐라이페의 명소인 브륀셴 코너에 현대차가 조성한 ‘팬존’을 찾았다. 경기 중 사망한 레이서들의 이름이 아스팔트 위 낙서로 남아 있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진흙 위에서 비를 맞으면서도 서킷을 보며 서로 얘기를 나눴다. 하노버에서 온 데누스 슈와츠 씨(28)는 “밤새 노르트슐라이페 펜스를 돌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며 “유명한 드라이버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어 즐겁다”고 말했다.

‘퍼지지 않고’ 살아남은 차들은 18시간째 달리고 있었다. 하지만 일부는 속도가 눈에 띄게 느려졌다. 덜렁거리는 범퍼를 붕대처럼 테이프로 감은 차들도 보였다. 피트에 들어가 몇 시간째 나오지 못하는 차도 많았다.

비었던 GP-슈트레케의 관중석도 다시 차기 시작했다. 브륀셴에 비해 이곳은 가족 관람객들이 많은 편이었다. 친구와 각각 아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은 후베르투스 뮐러 씨(50)는 “아들과 1년에 두세 번은 꼭 모터스포츠를 직접 관람한다”며 “24시간 동안 어떤 돌발 상황이 생길지 몰라 흥미진진하고 긴장되는 것이 뉘르24의 매력”이라고 강조했다. 응원하는 팀이 있느냐는 질문에 뮬러 씨는 “30년이 넘은 오펠 ‘만타’ 모델로 매년 출전하는 팀이 있어 응원하는데 이번에는 완주하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현대차 모두 완주, ‘N’도 성공적… 지옥 끝에는 영광이

현대차 ‘N’을 위해 개발 중인 엔진을 장착한 현대차 출전 차량이 한밤중 피트(정비구역)에서 정비를 받고 있다. 이때 운전자 교대도 이뤄진다. 현대차 출전 차량 3대는 모두 완주에 성공했다. 현대자동차 제공
현대차 ‘N’을 위해 개발 중인 엔진을 장착한 현대차 출전 차량이 한밤중 피트(정비구역)에서 정비를 받고 있다. 이때 운전자 교대도 이뤄진다. 현대차 출전 차량 3대는 모두 완주에 성공했다. 현대자동차 제공
29일 오후 3시 반. 모든 관계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GP-슈트레케의 결승선을 지켜보던 관중이 일어나 기립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경기가 끝났음을 알리는 체커기(旗)를 받는 차들에게 보내는 갈채였다. 영광의 상처를 입지 않은 차를 찾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모두 완주에 성공했다. 그것만으로도 박수를 받기에 충분했다.

완주의 기준은 1위의 절반 이상을 달렸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주행을 하고 있는 것. 이번 대회의 1위부터 4위는 모두 최상위 클래스인 ‘SP9(5200cc 이상급)’에서 메르세데스-AMG ‘GT3’ 모델로 출전한 팀들이 싹쓸이했다. 5위는 BMW의 ‘M6 GT3’이었고, 지난해 우승을 차지한 아우디 ‘R8 LMS’는 8위에 올랐다. 1위인 ‘블랙 팰컨’ 팀의 차는 서킷을 총 134바퀴를 돌았는데도 2위보다 고작 6초 먼저 들어왔다.

시상대에 오르진 못하더라도 완주에 성공한 모든 이가 승자였다. 159대의 차 중 완주에 성공한 차는 101대로 완주율은 63.5%였다. 현대차 팀으로 출전한 3대는 모두 완주에 성공했다. 특히 1.6 터보엔진을 단 벨로스터는 전체 65위에 올랐다. SP2T 클래스의 차 5대 중 1위에 올랐다. ‘N카’는 전체 90위에, 1.6 터보엔진을 단 i30는 97위에 올랐다. N카는 로암(바퀴 움직임을 조정하는 하부 부품)이 세 차례 파손되긴 했지만 ‘핵심’이랄 수 있는 엔진과 파워트레인(동력전달계)은 문제가 없었다. 이 차들이 체커기를 받는 순간, 서로를 얼싸안던 현대차 팀 관계자 중 몇몇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출전 대수가 많은 AMG와 M, 포르셰, 아우디, 애스턴마틴 등 세계적 고성능 차들은 상위권에도 이름을 많이 올렸지만 완주하지 못한 차 중에도 많았다. 올해로 3년째 뉘르24에 레이서로 출전한 현대·기아자동차 남양연구소 최장한 책임연구원(42)은 “그만큼 팀의 실력과 차의 성능은 기본이고 운까지 따라줘야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는 경기”라고 설명했다.

이날 수집된 데이터는 현대차가 N을 개발하는 데 소중한 밑바탕이 된다. N 개발을 총괄하고 있는 알베르트 비어만 시험·고성능차 개발 담당 부사장(59)은 경기 직후 “매우 만족한다. 특히 N카의 엔진과 파워트레인에 문제가 생기지 않았다는 점이 그렇다”며 “이 차의 강건함을 입증했고 다른 차들의 성적도 좋다. 오늘 얻은 데이터를 N 개발에 적용할 것”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뉘르부르크=김성규 기자 sunggyu@donga.com
#독일 뉘르부르크링 서킷#24시 내구레이스#현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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