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가쁘게 진행돼 온 현대상선의 용선료 협상 결과가 곧 발표될 예정입니다. 앞서 용선료 협상에 실패해 법정관리에 들어갔던 팬오션과 대한해운의 사례를 생각해 보면 용선료 협상의 타결 전망이 높아진 것만으로도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하지만 마냥 안도의 한숨을 쉬기에는 용선료 협상이 남긴 뒷맛이 씁쓸합니다. 해운동맹 가입이라는 큰 산이 하나 더 남아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번 협상이 한국 해운업계에 ‘신뢰도 추락’이란 큰 상처를 남겼다는 의미입니다.
당장 원래 약속(용선계약)을 지키자니 굶어죽을 판이라 ‘상황이 바뀌었다’고 졸라서 어느 정도 약속을 바꾼 건 다행입니다. 하지만 당초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현대상선은 협상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내가 망하면 너도 돈 떼이게 된다’는 식의 배짱을 부려야 했습니다. 업체뿐만 아니라 정부까지 나서서 전체 과정을 진두지휘했고, 당연히 국적 해운사 전반에 대한 신뢰도 추락을 불러왔습니다.
해운업계 관계자는 “세계 경기가 다시 살아나 배만 있으면 돈을 버는 시기가 다시 올 수도 있는데, 그때 외국 선주들이 한국 해운사에 배를 빌려주려 하겠느냐”며 “정부까지 나서 약속을 뒤집을 수 있다는 계산에 다른 나라보다 더 높은 가격을 요구할 수도 있다”고 걱정스럽게 말했습니다.
협상 내용도 개운치 않습니다. 협상 초반 용선료 ‘인하’를 기대했지만 지금은 사실상 용선료 ‘조정’이란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해외 선주가 받아야 할 돈을 주식으로 바꾸거나, 돈 받는 시기를 조금 늦추는 방법도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해외선주로서는 크게 손해 본 것 없다는 평가도 많습니다. 그간 사업을 함께해온 파트너로서 해외선주들도 ‘상생’을 위한 ‘고통분담’에 함께할 것이라고 했던 기대가 얼마나 헛된 것이었는지 깨닫는 과정이었습니다.
세계 해운업계의 냉정함은 극지항로의 빙하처럼 깨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장 현금이 부족해 허덕이는 것을 알면서도 용선료 연체에 곧바로 억류로 대응했습니다.
당장 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 약속을 깬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합니다. 하지만 마치 ‘신용카드 돌려 막기’처럼 미래소득을 미리 당겨 위기를 넘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해운업계는 이 위기가 지나면 어떻게 다시 신뢰를 회복할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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