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앞에 ‘사즉생(死則生·죽고자 하면 산다)’이라는 수식어가 붙으면 피가 끓는다. 다분히 선동적인 분위기를 띨 수 있다.
구조조정은 기업의 회생 가능성과 관련 산업의 흐름을 종합해 조용하고 신속하게 처리해야 할 냉정한 수술이다. 포장지가 요란하고 두꺼우면 알맹이가 뭔지 헷갈린다. 기록 안 남기는 청와대회의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 4월, 청와대 서별관회의에 들어간 홍기택 당시 산업은행 회장은 정부 관계자들로부터 자금난에 빠진 STX팬오션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홍 회장은 구체적 지시 내용을 문서로 만들어 달라고 했다. 문제의 소지가 될 자료를 남길 당국자는 없다. 이후 STX팬오션의 부채비율은 2400%까지 높아졌고 2013년 6월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이게 ‘사즉생 포장지’ 속의 실체다.
요즘 구조조정 실패의 책임자로 지목돼 코너에 몰린 산은은 3년 전 정부가 자신들을 압박한 정황을 들어 반격에 나서고 있다. ‘익명의 산은 고위 관계자’로 몸을 숨긴 산은 인사들이 정부의 강요로 좀비기업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는 식으로 불만을 쏟아내는 것이다.
정부는 자세를 낮추며 방어벽을 쌓고 있다. 역시 익명을 요구한 정부 당국자는 “STX 관련 지원 방안을 두고 의견을 교환한 것은 맞지만 구체적인 지시가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했다. 다른 관계자는 “개별 회사에 대한 지원은 금융회사가 하는 것이지 정부가 결정하지 않는다”고 했다. 매뉴얼에 따른 것인지는 모르지만 꼬투리 잡을 게 없다.
정부가 구두로 지시했고, 지시에 대한 산은의 대응도 구두로 이뤄졌으니 이 공방의 승자는 가릴 수 없다. 정권 초기의 분위기를 망치지 말라며 좀비기업 연명을 지시한 정부나, 낙하산 인사로 좀비기업의 단물을 빨아먹은 산은이나 구조조정 실패의 공범이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내분에 빠진 상황인데도 유일호 경제부총리, 임종룡 금융위원장, 이동걸 산은 회장이 한목소리로 ‘사즉생’을 외치니 더 불안해진다.
지금의 구조조정이 특히 불안한 것은 금융기관들이 약속이나 한 듯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이다. 4월 말 한진해운 2대 주주인 신용보증기금이 협약채권기관에서 탈퇴하고 독자 행동에 나선 것이 그런 예다. 신보는 한진해운에 직접 돈을 빌려준 것이 아니라 보증을 선 것이므로 구조적으로 채권단에 가입할 수 없다고 해명하고 있다. 비록 채권단에서 빠졌지만 채권단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정부에 ‘구두’로 약속한 점도 우리가 익히 아는 금융기관의 태도와는 거리가 있다. 게다가 신보는 한진해운과 같은 업종인 현대상선 자율협약에는 참여했다. 사즉생 구호에 부실 묻히나
기업의 부실은 보통 기업, 금융회사, 회계법인, 금융당국이라는 4중 감시 장치를 거치면서 드러난다. 한국에선 셀 수 없이 많은 낙하산 인사 때문에 이 장치가 먹통이다.
공기업 출신인 A 씨는 청와대에서 ‘인사 검증에 동의하느냐’는 전화를 받은 뒤 어느 날 금융공기업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행운이 넝쿨째 굴러왔다고 생각했다. 그런 인사에게 중립적인 일처리를 기대하는 건 말이 안 된다. 구조조정의 적은 바로 이런 유착 고리다.
감시 레이더가 엉터리라면 명목상 구조조정의 주체인 채권단이 정부 구두 지시를 기록으로 남겨 사후 검증하는 것도 필요하다. 구조조정 태스크포스(TF)가 무책임한 구두 지시로 경제를 망친다면 다음 정부에서 청문회뿐 아니라 법적 책임까지 질 각오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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