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조조정 ‘실탄’ 마련 방안을 두고 팽팽히 맞서왔던 정부와 한국은행이 겨우 접점을 찾았다. 하지만 정부가 4월 26일 “적정 규모의 자본 확충을 하겠다”고 발표한 뒤 43일 동안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 방안을 놓고 서로 상대의 지갑을 열게 하려는 신경전을 벌이며 구조조정의 골든타임을 허비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또 컨트롤타워 부재 논란에 뒤늦게 경제부총리 주재 관계장관회의를 만들었지만 주요 의사결정이 모두 청와대 서별관회의(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한은 총재, 대통령경제수석비서관, 금융위원장, 금융감독원장이 참여하는 비공개 경제금융점검회의)에서 결정되는 상황에서 제 역할을 하기 쉽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다.
○ 구조조정 실탄 ‘12조 원+α’ 마련
정부와 한은은 8일 “구조조정 상황이 악화될 경우 KDB산업은행과 한국수출입은행에 5조∼8조 원 수준의 자본 확충이 필요한 것으로 분석됐다”고 설명했다. 조선·해운업뿐만 아니라 철강·건설 등 경기민감업종이 부실화할 경우와 앞으로 강화될 은행 자본규제(바젤Ⅲ) 등을 감안해 산정된 금액이다. 3월 말 현재 산은과 수은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기자본비율은 각각 14.6%, 9.9%로 당장 구조조정 추진에는 문제가 없지만 향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늘어날 자본 손실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게 정부와 한은의 설명이다.
정부와 한은이 추진하는 국책은행 자본 확충 규모는 총 12조 원 이상(자본확충펀드 11조 원+1조 원 이상 직접 출자)으로 현재 필요한 자금 규모를 크게 웃돈다. 정부 관계자는 “향후 예측하지 못한 상황에 충실한 방어막을 만들기 위한 조치”라고 말했다.
자본확충펀드는 한은이 대출해 준 10조 원 등으로 펀드를 만들면 펀드가 산은과 수은의 조건부 자본증권(코코본드)을 매입해 은행의 자기자본비율을 높여주는 방식이다. 자본확충펀드 규모는 11조 원이지만 한꺼번에 지원되는 게 아니라 국책은행의 요청(캐피털 콜)이 있을 때마다 자금이 마련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정부는 산은보다 자본 확충이 시급한 수은의 건전성을 높이기 위해 9월 말까지 공기업 주식 등을 활용해 수은에 1조 원을 현물 출자하기로 했다. 또 내년도 예산에 산은과 수은에 현금 출자하는 금액을 반영하기로 하고 국회 동의 절차를 밟을 예정이다.
구조조정 실탄 마련의 급한 불은 껐지만 여전히 논란의 불씨는 남아 있다. 정부와 한은이 ‘시장 불안이 금융시스템 리스크로 옮겨가는’ 최악의 상황일 때 한은이 수은에 직접 출자할 가능성을 열어뒀기 때문이다.
○ 구조조정 대책 효과에 ‘의문’도
일각에서는 이번 대책의 효과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정부는 국책은행 상황이 악화되더라도 ‘12조 원+알파(α)’면 구조조정을 진행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주요 조선업체와 해운사에 대해 이미 드러난 은행권의 위험 노출액(익스포저)이 70조 원에 육박하는 상황에서 분식회계 등에 따른 숨겨진 부실이 언제든 나타날 수 있어 낙관할 수 없다는 지적이 많다. 이번에 나온 대책만으로는 국책은행과 부실 업종에 대한 분석의 적절성과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 대책’에 대한 국민적 우려를 씻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이다. 국책은행 역할 전반의 개혁이 뒤따르지 않는 한 다른 업종에서 언제든 비슷한 부실이 나타날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일단 구조조정이 궤도에 오른 만큼 빠른 실행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견해도 있다. 전광우 전 금융위원장은 “자금이 충분한지, 한은의 발권력 동원이 옳은지에 대한 논란이 있지만 결국은 지엽적인 문제”라며 “더 이상 시간을 끌지 말고 속도감 있게 추진해야 어렵게 마련한 이번 대책의 효과가 극대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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