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이 충만함으로써 비로소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마음의 거울이 맑아야 비로소 우주의 모든 것이 올바르게 마음에 비치는 것 아니겠소?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이중섭·다빈치·2011년)
‘광복동에서 만난 이중섭은/ 머리에 바다를 이고 있었다./ 동경에서 아내가 온다고/ 바다보다도 진한 빛깔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김춘수 ‘내가 만난 이중섭’ 중에서)
시인 김춘수의 눈에 비친 이중섭은 천재 화가가 아닌 따뜻한 가장(家長)이었다. 이중섭은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난 일본인 여성과 결혼해 두 아들을 얻었다. 가족과 함께 보낸 7년은 그의 작품세계를 지배하는 모티브가 됐다. 6·25전쟁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뒤 그는 가난과 그리움을 창작열로 불태웠다.
이중섭은 일본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편지와 그림을 보냈다. 이 책은 그 편지와 그림을 엮은 것이다. 가족이 사무치게 그립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지만 ‘인간 이중섭’의 따스함을 엿볼 수 있다. ‘종이가 부족해 그림을 한 장만 보내니 사이좋게 나누어 보라’는 편지글에선 곤궁한 처지에도 가족을 향한 변함없는 애정이 묻어난다. 아내에게 사흘에 한 번은 편지를 보내 달라고 아이처럼 조르는 모습도 보인다.
이중섭이 ‘황소’ 같은 명작을 그릴 수 있었던 건 그의 말처럼 애정이 충만한 덕분이었다. 이는 예술이나 위대한 성취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참된 애정이 가득한 사람은 세상을 올바르게 보고 제대로 사랑할 줄 안다.
주변에 넘쳐나는 ‘혐오’를 바라보는 것이 버거운 요즘이다. 혐오라는 단어 하나에 수만 가지 해석이 따라붙는다. 지금 필요한 건 각종 혐오를 둘러싼 논란이 아니라 참된 애정의 회복이다. 사랑하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불러온다. 충만한 애정으로 마음이 맑아지고 온 세상이 올바르게 마음에 비치면 더 이상 혐오가 발 디딜 곳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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