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 해운업체 대표 A 씨는 직원 명의로 조세회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했다. A 씨는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회사 수익을 숨기는 데 그치지 않고 페이퍼 컴퍼니에서 나오는 배당금을 홍콩의 차명계좌를 통해 국내에 몰래 들여온 뒤 호화주택을 구입하는 등 흥청망청 썼다. 국세청 세무조사를 받은 A 씨는 소득세 등으로 500억 원가량을 추징당하고 조세포탈 혐의로 검찰에 고발됐다.
A 씨의 사례는 올 1월 국세청의 역외탈세 세무조사를 통해 밝혀진 내용이다. 국세청이 15일 역외소득 은닉 혐의자 36명에 대해 세무조사에 착수하기로 한 것은 이 같은 고의적인 역외탈세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파나마 법무법인 모색 폰세카의 유출 자료인 ‘파나마 페이퍼스’가 공개되고, 여기에 한국인 180여 명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지면서 국세청의 움직임이 더 빨라졌다.
홍콩의 한 페이퍼컴퍼니 설립 대행 회사. 이 회사는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고 세금 탈루하는 것을 돕는 역할을 한다. 국세청 제공파나마 페이퍼스에는 노태우 전 대통령의 장남 재헌 씨를 비롯해 아모레퍼시픽 창업주인 고 서성환 회장의 자녀 영배·미숙 씨, 박병룡 파라다이스 대표, 조태권 광주요 회장 등 정치권 및 경제계 유력 인사들의 이름이 대거 올라 있다. 국세청은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가 폭로한 한국인 180여 명 외에도 50명 안팎의 한국인이 추가로 파나마 페이퍼스와 연관된 혐의를 잡고 조사를 준비 중이다. 한승희 국세청 조사국장은 “특정인에 대한 조사 여부는 확인해 주기 어렵다”고 밝혔다.
세무 당국은 조세회피처에 페이퍼 컴퍼니를 설립한 행위를 소득·재산을 은닉하고 세금을 탈루하기 위한 시도로 해석하고 있다. 국세청 관계자는 “페이퍼 컴퍼니 설립 자체가 불법은 아니지만 그런 지역에 법인을 세우는 것 자체가 떳떳하지 못한 목적을 갖고 있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하다”고 말했다. 조사 대상자들은 페이퍼 컴퍼니를 통해 중개수수료 및 용역 대가 명목으로 회사 자금을 빼돌리거나, 현지에 투자했다고 속이며 회삿돈을 유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앞서 지난해 10월부터 올 3월까지 6개월간 ‘해외 소득·재산 자진신고제’를 운영한 만큼 이들에게 충분한 관용을 베풀었다는 판단도 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국세청은 자진신고제를 실시하면서 주요 언론을 통해 적극 홍보를 하고 해외에 소득이나 재산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게 직접 우편 등으로 안내문을 보내면서 자진신고를 독려했다. 가산세와 과태료를 깎아주고 형사 처벌에 대한 관용 조치까지 포함한 ‘단 한 번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찬 만큼 역외탈세자에 대해서는 법과 원칙에 따라 강력하게 대응하겠다는 게 국세청의 방침이다. 한 국장은 “세금 탈루 등을 제보할 경우 관련법에 따라 최대 30억 원의 포상금을 지급한다”며 “국제 공조 등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해 역외탈세를 추적할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롯데그룹의 검찰 수사 등으로 촉발된 사정 정국에 ‘경제 검찰’ 격인 국세청이 적극 동참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최근 진행 중인 롯데 수사의 기초자료 상당 부분은 호텔롯데, 롯데쇼핑 등을 대상으로 진행한 세무조사를 통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역외탈세 조사와는 별도로 국세청은 부영그룹에 대한 세무조사를 최근 마쳤고 코오롱, SK해운 등에 대한 세무조사도 진행 중이다. 대기업을 상대로 한 사정 정국의 막이 오른 이상 국세청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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