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삼성물산과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의 경영권 분쟁이 발생한 지 1년이 지났지만 적대적 인수합병(M&A)에 대한 경영권 방어 장치를 마련한 국내 기업은 극소수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대기업 지배구조가 여전히 취약하고 ‘경영권 방패’도 허약해 엘리엇과 같은 헤지펀드의 공격이 발생하면 ‘제2의 엘리엇 사태’가 재연될 수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재계는 20대 국회에서 차등의결권 제도나 신주인수선택권(포이즌 필) 등의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제도적 장치 도입을 주장하고 있지만, 대기업 특혜 시비로 적지 않은 진통이 따를 것으로 보인다. ○ 1년간 1% 기업만 적대적 M&A 방어 강화
19일 대신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7월부터 올해 5월 말까지 주요 연기금 및 기관투자가가 지분 5% 이상 보유한 상장사와 대기업집단 계열사 등 600개 회사 중 적대적 M&A 방어를 위한 조치를 도입한 회사는 6개사(1%)인 것으로 조사됐다. 이 기간 정관 변경을 안건으로 상정한 회사는 모두 231곳이었다.
현행 제도에서 도입 가능한 적대적 M&A 방어 조치는 기업 인수 비용을 높여 적대적 M&A 시도를 무력화시키는 ‘황금낙하산’ 제도, 이사 자격 요건 강화, 주주총회 의결 기준 강화 등이 있다. 지난 1년간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인 식품업체 풀무원, 코스닥시장 상장사인 경매업체 서울옥션, 반도체장비업체 테크윙, 자동차부품업체 우리산업 등이 이 같은 경영권 방어 장치를 마련했다. 반면 엘리엇과 같은 외국계 헤지펀드의 주요 공격 목표가 되는 대기업 계열사 가운데 경영권 방어를 강화한 회사는 한 곳도 없었다.
안상희 대신경제연구소 전문위원은 “‘엘리엇 사태’ 이후 경영권 방어가 주요 이슈로 떠올랐지만, 외국인 투자자 또는 소액주주들의 반발 때문에 실제 경영권 방어 강화를 위한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대 주주가 자사주를 매입하는 방안도 경영권 방어 조치로 꼽힌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다. 지난해 대기업집단 계열 상장사 249개 회사 중 39개사의 최대주주가 자사주를 매입한 것으로 분석됐다. 안 전문위원은 “자사주 매입에 드는 비용이 크기 때문에 보유 현금이 넉넉한 일부 기업만 가능한 방법”이라고 분석했다.
○ 차등의결권 도입 등 진통 예상
재계는 적대적 M&A에 대한 경영권 방어를 위해 줄곧 차등의결권이나 신주인수선택권 도입을 요구하고 있다. 차등의결권은 주식 종류별로 의결권 수를 다르게 발행하는 것이며, 신주인수선택권은 기존 주주들이 신주를 싼 가격에 살 수 있도록 해 헤지펀드와 같은 적대적 M&A 세력으로부터 경영권을 보호하는 장치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자사주 매입, 배당 외에는 경영권 방어 수단이 없다보니 기업들이 만약을 대비해 보유 현금을 늘리는 경향이 있다”며 “차등의결권 같은 제도가 뒷받침되면 투자가 더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19대 국회에서 정갑윤 새누리당 의원이 차등의결권과 신주인수선택권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하는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정 의원 측은 20대 국회에서 해당 법안을 다시 발의할 방침이다. 하지만 ‘여소야대’ 국면에서 경영권 방어 장치를 대기업 특혜로 여기는 야당과 시민단체를 설득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여기에다 차등의결권 등의 장치가 대기업 외에는 큰 효과가 없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다. 중견기업연합회 관계자는 “원론적으로 기업에 도움이 되는 건 맞지만, 중소·중견기업의 상황과는 거리가 있다”고 말했다.
금융투자업계와 재계는 국내 기업들이 경영권 방어 장치가 여전히 취약하다는 사실이 노출된 만큼 언제든지 헤지펀드의 공격이 재연될 수 있다고 우려한다. 이 때문에 경영권 방어를 위한 제도 도입을 위한 논의 외에도 국내 기업들이 투명한 지배구조와 주주 중시 경영을 펼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외국계 헤지펀드의 움직임을 예측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며 “1년 전과 같이 대기업 지배구조 문제가 여전하고, 제도도 변한 게 없어 당장 내일 ‘제2의 엘리엇 사태’가 일어나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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