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택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부총재가 2월 초대 부총재로 공식 선출된 뒤 밝힌 소감은 ①“관계기관의 협조에 감사한다” ②“AIIB 발전과 국익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였다. ①은 참, ②는 거짓이다.
지난달 그는 “대우조선해양 지원은 정부가 결정했고 나는 들러리였다”는 언론 인터뷰로 파문을 일으킨 데 이어 AIIB에 6개월 휴직계를 냈다. ‘홍기택 낙하산’을 산은에 이어 국제기구에까지 투하했던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배신이라는 관전평은 이 문제를 가벼운 가십거리로 만든다. 진실은 더 무겁다. 정부가 “잘 봐 달라” 로비
진리췬 AIIB 총재는 지난해 9월 방한 기간에 홍기택 당시 산업은행 회장을 만난 뒤 인품과 학식에 감명받아 부총재로 사실상 낙점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AIIB는 세계 57개국이 참여하는 중국 주도의 국제금융기구다. 미국에 대한 도전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무릅쓰고 각국은 경제적 이익을 좇아 ‘가보지 않은 길’을 택했다. 이런 기구의 부총재를 인상을 보고 골랐을까.
정부 고위 당국자의 설명이 좀 더 합리적이다.
“중국 측에서 홍 회장에 대해 부정적이었다고 들었습니다. 국제금융 경험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이 과정에서 정부가 ‘홍 회장이 꼭 돼야 한다’는 논리로 많이 도와줬다고 합니다. 이게 부총재 선임 직전인 올 초 상황입니다.” 로비를 한 정부조차 그를 국제금융 전문가라고 보지 않았다. 산은 총재를 지냈으니 글로벌 프로젝트 파이낸싱을 다뤄본 경험이 많을 것이라고 간주한 게 전부다.
홍기택은 투자위험관리 담당으로서 5명의 AIIB 부총재 가운데 서열 3위지만 내부 회의에서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지난달 25일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AIIB의 첫 총회에도 불참했으니 그는 AIIB 발전에 도움을 주지 못했다.
진 총재는 투자위험관리 담당 부총재 자리를 6개월이나 비워둘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있다. 휴직 기간이라도 새 부총재를 선임할 가능성이 높다. AIIB는 홍기택을 해임할 법적 근거가 없어 휴직을 권고한 것이지 속내는 당장이라도 나가라는 것이었다. 우리나라가 37억 달러(약 4조3000억 원)를 대고 얻은 부총재 자리를 외국에 뺏길 판이다. 한국의 안미경중(安美經中·안보는 미국, 경제는 중국) 전략은 ‘홍기택 리스크’로 어그러졌다. ‘국익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그의 다짐도 공염불이 됐다.
한국은 2014년부터 중국이 주도하는 AIIB의 지배구조가 투명하지 않다고 지적하던 터에 AIIB 출범 후 불과 5개월 만에 한국 스스로 낙하산 인사의 민낯을 드러냈다. 한국이 앞으로 AIIB 내부에서 국익을 위한 주장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중국이 홍기택 인선 과정을 들먹이며 ‘또 로비하는 것이냐’고 한다면 어쩔 텐가. 한국은 중국에 약점을 잡혔다.
중국에 호구 잡힌 한국
‘홍기택 사태’는 낙하산 인사가 나라를 망칠 뇌관임을 보여준다. 요직 하나를 개국공신에게 떼어주는 정도가 아니라 한 나라의 산업구조, 외교적 위신, 국제 경제적 이익에 동시다발적으로 손해를 끼칠 수 있음을 드러냈다. 박 대통령이나 홍기택이 이런 폐해에 눈감고 있는 현실이 두렵다.
감사원이나 검찰 어느 쪽도 홍기택을 불러들이지 못하고 있다. 아직도 정권 실세라는 것인가. 그는 지금 해외에 머물며 대우조선 부실이 내 책임이 아니라는 논리를 개발하는 데 여념이 없을 것이다. 그가 앞으로 국격을 얼마나 더 끌어내릴지 모른다. 박 대통령이 직접 ‘홍기택 낙하산’을 접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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